파리에서는 쿠르베가 우리나라에서는 도미에가,
쿠르베와 도미에는 19세기 사실주의 대표적인 두 작가.
쿠르베와는 달리 마치 연극의 한 요소처럼 느껴지는 풍자적인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지만, 내용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그들의 현실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이 글씨 클릭~ 도미에 자료.
2008년 오노레 도미에 탄생 200주년展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1,3,4,5 갤러리
www.snumoa.org
2007_1214 ▶ 2008_0131
오노레 도미에가 태어난 1808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하는 1879년 사이 프랑스는 크고 작은 시민항쟁들이 끊이지 않는 정치적 질풍노도의 시대를 경험했다. 이러한 시민항쟁들은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계층이 세속제의 보수왕권의 종말을 요구함과 동시에 스스로만을 살찌우기 바쁜 귀족층의 횡포에 대항하여, 노동을 할 권리와 그 대가로 빵을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을 주장한 것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상과 구속, 감금이라는 희생을 치르며 진행되었다. 1830년 7월 혁명, 1832년 파리폭동, 1848년 2월 혁명, 6월 혁명 등은 봉건군주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하려는 시민의, 나아가서는 시대의 움직임으로 기억된다. 이 격동의 중심지 파리에서 도미에는 타락한 정치가들을 풍자화로 날카롭게 비판하는가 하면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애정 어린 따스한 시선으로 기록하였다. 마르세이유의 액자 집 아들로 태어난 도미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던 유화작업을 대신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1829년부터 일간지에 정치풍자화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국왕의 살찐 얼굴을 서양배에 비교하여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도미에의 캐리커쳐는 서민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보수파 정부에게 정치범으로 몰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후로 도미에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내용으로 주제를 바꿔가며, 파리시민들의 일상과 여가생활, 사랑과 자녀교육 등을 유머 가득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는 석판공방에서 견습생활을 하던 21살 때부터 시력저하와 곧 이은 시력상실로 더 이상 작품 제작이 불가능해진 65살까지, 많게는 일년에 약 125점(3일에 한 작품 꼴)을 제작, 일생 동안 총 약 4천여 점의 석판화를 남겼다. 도미에에게 있어 이 작품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기록이자 소시민에게 주어진 발언의 장이었으며 당대를 살아가는 한 파리지안으로서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오노레 도미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이타미시립미술관과의 교류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서는 1830년 7월 혁명 직전에 제작된 작품번호 1번에서부터 1868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암시하는 말년의 작품까지 총 146점의 석판화를 [모던 파리], [부부와 가족], [여행과 여가], [정치풍자]의 네 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의 정치가들의 얼굴을 희화화해서 재현한 풍자조각, 도미에의 초기 유화양식을 엿보게 해주는 회화작품을 포함한 총159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_살롱의 관중 9_종이에 석판화(L.D.2299)_≪르 샤리바리≫-1852년 5월 14일“경쟁자의 작품을 검토하는 예술가들”
L.D.는 Loys Delteil의 약자로 도미에의 석판화 전체 도록의 저자명이다.
모던 파리 ●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좁은 돌담골목에 오수가 흐르던 중세의 도시에서 개선문이 들어서고 방사선의 대로 불르바드가 뻗어나며 실크해트와 거대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중산계층이 도시를 활보하는 모던한 도시로 거듭난다. 도미에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와 미술전람회인 살롱, 식물원을 찾은 관광객을 비롯하여 새로이 등장한 세력인 여성운동가들의 활약상까지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살롱의 관중〉은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지에 1852년 4월부터 5월까지 연재된 11점의 프린트 연작이다. 파리에서 매해 열리는 미술 전람회인 살롱은 약 백만 여명의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미술 축제로, 수백 명의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를 들어, 1834년의 살롱에는 첫날에만 3만 여명의 방문객이 모였다. 두 달이라는 전체 기간 동안 총 백만 여명의 관중이 전시를 보러 왔다. 어떤 날에는 티켓 가격이 20수(약 만원)로 내리거나 무료인 경우도 있어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살롱은 새롭고 현대적이며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화가들에게도 절호의 시장이었다. 사설화랑과의 연결이 쉽지 않은 진보적 화풍의 작가들에게는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심사위원은 작가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보수적인 심사위원에 의해 살롱에서 한 번 거절당한 작가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종종 살롱에서 거절당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가 열리기도 했는데, 1855년에도 쿠르베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기에 너무 혁명적이라 여겨져 거절당하자, 살롱 밖에서 자신만의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보들레르는 살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시대 파리에서 들라크루아에 비할 수 있는 작가는 두 명뿐이다. 캐리커쳐 작가인 도미에와 앵그르다.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노레 도미에_철도열차 안에서 6_종이에 석판화(L.D.3301)_≪르 샤리바리≫-1864년 8월11일
"즐거운 여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여행과 여가 ● 19세기 파리의 휴일을 담은 모습에서는 더 이상 농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중산노동자층들의 야외 나들이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파리외곽의 호수나 전원지대를 하루에 왕복 할 수 있게 해준 철도열차의 대중화는 도미에 이후의 인상파화가들에게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철도열차 안에서〉는 시사일간지 ≪르 샤리바리≫지에1864년 8월과 9월사이 게재되었던 6점의 판화 연작이다. 고속으로 파리와 파리 근교를 잇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함에 따라 여유 있는 파리인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교외로 나가 주말을 즐기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새로운 기차 여행은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승객들은 자주 강도를 당했고, 때문에 이 새로운 교통수단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단둘이 일등칸에 탄 승객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앉아있고 각자의 손에는 권총까지 쥐어져 있다. 당시의 열차는 차량 간에 통할 통로가 없고 밖에서 열쇠를 거는 형태였으므로 일단 출발하면 다음 정차역까지 완전한 밀실상태였다. 따라서 실제로 밀실상태의 일등칸 속에서 폭행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며 유럽의 추리소설들은 이런 사건들을 주제로 쓰기도 했다. (이타미시립미술관 ‘도미에’ 도록 77번 참조.)
오노레 도미에_결혼에 관한 풍경 7_종이에 석판화(L.D.630)_≪르 샤리바리≫-1839년 6월 9일
"결혼한 지 6개월 공감은 영혼의 결합"
부부와 가족 ● 도미에가 그리는 부부와 가족상에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모습이 묻어난다. 19세기파리에서도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기쁨은 두 배로, 때로는 미움도 두 배로 증폭되어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나 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둘을 잇는 것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자식들이다. 〈결혼생활〉은 60점의 연작으로 1839년 5월 19일부터 1842년 10월 12일 사이에 ≪르 샤리바리≫지에 게재되었다. 이 연작이 발표되었을 때, 도미에는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린 다시Alexandrine Dassy와 아직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연작에 상냥한 아내로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파리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남성이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때에 여성 해방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므로 이 연작에 도미에가 묘사한 사소한 말다툼이나 분쟁들은 당시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특히 이웃의 결혼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도미에의 판화를 정리한 로이스 델테이유 Loys Delteil는 ≪르 샤리바리≫지의 1월 판에서 이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파리의 가족들은 도미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비판정신을 본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불행과 재난들을 진솔하게, 그러나 희극적으로 그려낸다. 이 예술가를 뛰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무자비한 솔직함이다. 독신으로서의 삶을 끝내려고 고심하는 자들에게 이 연작은 위로가 될 것이며, 모든사람들에게, 기혼자들에게도 또한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 직후에 〈여성사회주의자〉와 〈청탑파 ??派〉가 등장하여 남성 우월주의를 끝내고, 남녀 평등을 주장했다.
오노레 도미에_L’Association Mensuelle_종이에 석판화(L.D.131)
월간석판화협회-1834년 1월
"입법부의 배.1834년 타락한 각료석의 풍경."
정치풍자 ● 도미에의 오랜 석판화 작업은 정치풍자화에서 시작하여 정치풍자화로 끝을 맺는다. 진실을 직시하고 거침없이 부정을 고발하는 도미에의 통쾌한 이미지들은 대부분이 문맹이던 당시 서민들의 뇌리에 그 어느 칼자국보다도 강력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도미에의 정치풍자화들은 시민의식의 고양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작품번호 L.D.131은 도미에의 가장 중요한 판화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월간석판화협회에서 판매한 이 석판화는 1832년 8월에서 1834년 7월에 걸쳐 24점이 자금조달의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타미시립미술관 ‘도미에’ 도록 39번 참조.) 이 판화는 이들이 대변해야 할 시민들의 민생고와는 멀리 떨어진 자아도취적이고 거만한, 스스로의 명예와 권리를 남용하는 시민대표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판화는 1834년 입법의회의 정확한 재현으로, 구성원들은 모두 풍자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도미에의 이전 작품에서 개별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그들은 이 극장과도 같은 공간에 한데 모여, 당시 정치계의 보수성, 부조리함, 무의미함 등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국가를 통치하는 책임을 질만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격이 부족해 보이는 정치권의 대표들과 직면했을 때 충격을 받게 된다.이 작품의 부제가 "chambre improstituee," 즉, ‘타락한 각료석’이라는 것을 알면 더 재미있어진다. ≪라 트리뷴 La Tribune≫지의 편집장 아르망 마라가 이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루이 블랑에 의하면, 그는 그가 출간하는 신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얼마나 이 매음굴에 속아왔고 조롱 당해왔는지!” 이후 의회는 ≪라 트리뷴≫을 고소했는데 재판에서 신문사에게 승소하였다. 하지만 ‘타락한 각료석’이라는 표현은 기억되었다. ≪라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지와 ≪르 샤리바리≫지의 발행인인 필리퐁 Philipon은 이 새로운 표현에 빗대어 "입법부의 배 Ventre legislatif"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판화는 당시대를 보여주는 자료일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놀라운 작업인데, 도미에는 35명의 의원들 모두를 4열의 반원형의 의회석에 끼워 넣으면서도, 화면에 과도하게 넘쳐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트랭스노냉 거리 Rue Transnonain"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예술에서의 새로운 사실주의를 예시하는 초기 작품으로 간주된다. ■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Exhibition > Painting&Pri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2회 BELT2008 선정작가展 (0) | 2007.12.25 |
---|---|
박주영 회화展 (0) | 2007.12.20 |
김성진 (0) | 2007.12.08 |
정보영 (0) | 2007.12.08 |
불멸의 화가 : 반 고흐 (0) | 2007.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