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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Painting&Prints

정보영

by @artnstory 2007. 12. 8.
Still Looking
이화익 갤러리 /
2007_1205 ▶ 2007_1218
www.leehwaik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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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주재자 ● 델프트의 화가 얀 베르메르의 잘 알려진 작품 「회화예술」(Schilderkonst)은 화가의 작업실을 재현하고 있다. 아니, 붓을 든 화가가 모델을 사생하고 있으니까, 작업과정 그 자체를 재현하고 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작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작업순간을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미술사학자들을 흥분하게 했다. 뢴트겐 사진을 찍어보니 「회화예술」의 캔버스 위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 구멍은 뒷벽에 걸린 지도에서 약간 왼쪽 아래 지점이었는데, 얀 베르메르는 그 부분을 덧칠해서 구멍을 교묘하게 감추어두었다. 구멍은 작품이 연출하는 화면공간의 소실점과 완전히 일치했다. 바닥과 천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소실선들이 일제히 그 구멍을 향해서 정렬해 있었던 것이다. 화가 얀 베르메르는 틀림없이 자신의 캔버스에 못을 치고 실타래를 풀어서 묶은 다음 힘껏 당겨서 소실선들을 대신했을 것이다. 결국 「회화예술」의 공간적 구성 얼개는 화가가 날줄과 씨줄을 엮어서 시공을 가로지르고 또 세로지르는 방식으로 생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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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정보영의 작품은 근대 이후 예술가들을 절망에 빠트렸던 원근법적 공간의 오랜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수학적 원근법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피렌체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원근법과 자연을 화해시키는데 실패했다. 시각 피라미드의 원리에 근거한 수학적 원근법을 조형미술에 수용하는 문제는 조형예술가들에게 단 한 차례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고, 결국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시한 세 가지 대안 원근법, 곧 공간원근법, 대기 원근법, 색 원근법에 의해 대체된다. ● 화가 정보영의 원근법적 작업방식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한다. 잘 알려진 대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원근법은 두 명의 발명자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건축적 원근법(legittima costruzione)를 이용해서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을 재현하고 대성당에서 시민들에게 시연을 했던 브루넬레스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회화론](Della Pittura)에서 창문 투시의 원리를 응용한 회화적 원근법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인문학자 알베르티이다. 정보영의 작업은 건축을 외부에서 접근하는 브루넬레스키의 방식과 건축적 공간의 내부 또는 자연 풍경을 재현대상으로 삼는 알베르티의 회화적 원근법을 동시에 구사한다. 왜 그럴까? ● 건축적 원근법은 입면도와 평면도의 조합을 통해서 조감도를 얻는 평면 결합적 방식이다. 수학적 실측이 전제되지만 항상 자연시점과는 별개의 이상적인 시점을 취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또 체계공간보다 집합공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가령 정보영의 건축물들의 외벽이 감상자의 눈높이나 소실점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항상 기울기가 없는 절대 수직을 취하는 것은 브루넬레스키의 추상적인 작업시점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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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회화적 원근법은 시각피라미드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횡단면이 곧 회화라는 알베르티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이 경우 이미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에 그려진 화가 마사초의 벽화 [성삼위일체]에서 문제점이 노출된 것과 마찬가지로 시각피라미드의 횡단면 바깥의 풍경이 회화적 재현의 대상이 된다면 횡단면 안쪽의 공간은 다룰 수 없는 것인지가 문제된다. 화가 정보영은 작품에서 유기적 체계공간으로서의 실내 공간을 구축하면서 이와 더불어 빛이 스며드는 창문을 장치하고 또 창문 바깥을 암시함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을 확장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여기에서 화가 정보영이 건축적 원근법과 회화적 원근법의 방식을 동시에 사용하는 까닭은 두 가지 원근법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을 파악하고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원근법을 통해서 제기된 본질적인 문제와 씨름하기 위해서이다. ● 화가 정보영의 작품에서 창문이나 리플렉스를 통한 빛의 작용은 상징적 의미를 띤다. 건축과 배경이 단색화하기 때문에 빛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사각형의 창문은 알베르티의 유산이자 그림 속의 그림, 시공의 소통, 문화의 만남, 지식의 체계, 비물질화의 증거, 정신적 확대경, 실재 또는 그 너머의 기호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요컨대 창문들은 시선을 유인하면서 시점을 암시하는 출발과 도착의 눈들이다. 해질 무렵 산등성이 능선 바깥의 어슴푸레한 빛, 그리고 창문을 통해서 마룻바닥에 기하학적인 도형을 새기는 빛도 은유적인 의미에서 창문의 범주에 포함된다. ● 르네상스 원근법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폭력적인 현상이었다. 무한원점, 곧 소실점의 통치 아래 모든 공간과 사물의 질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원근법적 공간에서 무질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인체조차 계량화, 수치화되었다. 인체비례이론이 등장하고, 화가들이 인간을 다면체들의 결합체로 환원시켜서 역사화의 구성을 짜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수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연의 자유로운 창조원리에 대한 관심도 달아올랐다. 진귀한 대리석 무늬들을 두고 자연이 스스로 손을 내밀어 창조한 예술이라고 보는가 하면, 대리석의 각양각색 무늬들을 그림에 그려 넣기도 했다. 가령 피렌체 화가 카스타뇨나 기를란다요가 그린 「최후의 만찬> 벽화에서 얼룩무늬의 대리석판을 인위적으로 그려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정형의 얼룩은 곧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창조의 열쇳말이 된다.
 보티첼리는 지우개로 사용하던 스펀지를 벽에다 던지고 알 수 없는 문양을 만든 다음에 그것을 바라보면서 작품의 구성을 구상했고, 피에로 디 코시모는 피가 섞인 가래침을 벽에다 뱉은 다음에 흘러내리는 가래와 토사물을 관찰하면서 구성의 얼개를 짰고, 레오나르도는 피어나는 구름과 진흙 수렁과 돌담의 얼룩으로부터 창의적인 역사화의 구성을 건져 올렸다. 레오나르도의 주장은 얼룩이론(teoria della macchia)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화가 정보영의 작품에도 초점이 맞지 않는 얼룩들이 등장한다. 가령 풍경 속의 구름이나, 실내 풍경의 벽면에서 발견되는 얼룩들은 시점의 원근과 상관없이 건축적 공간의 기하학적 재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면서 기묘한 구성적 긴장을 이룬다. 작품 속의 얼룩들은 같음에 대한 다름, 전체에 대한 부분, 단일성에 대한 다양성, 침묵에 대한 소란, 명료함에 대한 모호함, 통일성의 권위에 대한 반역, 완결성에 대한 거부, 말하기에 대한 사유하기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림 속의 얼룩들은 예술가의 창조적 카오스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 르네상스 원근법이 소실점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수학적 절대 시선을 주장한다면, 화가 정보영의 작품에는 시선들이 존재한다. 시선들은 작품 속에서 때로 사건과 만난다. 의자가 넘어지거나 촛불이 어둠을 벗겨 내거나 소실선이 달려 나가는 우연성과 돌발성은 화가의 손에 의해 창조된 가시적 지시들이자 표상적 계기들(momentum)이다. 그림 속의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신유명론 철학이 주장하는 시공을 초월한 절대자의 눈이 아니라 감상자의 자유로운 시선들이다. 시선들은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서 공간을 스쳐가고 점유하고 확대한다. 시선은 오르내리거나 떠돌면서 공간의 안팎을 재고한다. 회고하거나 예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계산하는 시선이라기보다 보류하는 시선이다. ●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를 인용하면서 원근법은 하나의 상징형식이라고 정의한다. 원근법의 형식을 사유하고 해체하면서 이미지화하는 화가 정보영의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더욱 궁금한 것은 화가가 감상자의 시선들을 부리는 방식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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