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의 우끼요에 일본판화
이전부터 종이와 먹 등의 기구를 사용 하였던 동양에서는 붓으로 칠해 찍는 수성 인쇄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수성용구의 사용은 같은 재료로 그려진 산수화나 화조화의 수묵화 원본과 비슷한 느낌을 주어 판화로 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이러한 채색수묵화의 복제를 위하여 개발된 다색판법은 우리 나라를 통하여 일본에 전해져서 우끼요에의 판법을 발전 시키 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일본에서는 한국의 영향이 깊었던 8c경 나라시대(708-781)부터(우리나라 - 삼국시대 백제와의 교류 이후 통일신라 시대이겠죠)목판을 이용한 불인(불상을 새긴 도장을 종이나 천에 무늬처럼 찍어서 탑 속에 넣었던 것)과 날염 등이 있어 다고 한다. 이후 17c에 이르러 나타난 에도시대는 막부라는 봉건 영주의 체제였지만…
(여기서 잠깐 일본의 역사 이야기를 할게요일본은 역사적으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환점을 계기로 국가로서의 발전을 거듭해 오는데요먼저 7세기 후반에 텐무 천황의 개혁정치를 통해 국가로서의 면모를 가 추구요국가적 면모를 가추면서 8세기에 우리나라와 교류도 하지요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진 16세기의 전국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통합된 국가체제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이루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통해 본격적인 근대화의 과정에 진입하게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전환기는 16세기에 있었던 일본의 통일과 통합된 국가체제의 정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려운가요?한마디로 피 튀기며 사무라이들이 전쟁을 치르고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살다가고 정신없는 시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일본에 도쿠가와이에야쓰 가 일본통일을 한다는 말이지요.무인들인 사무라이들의 전쟁이 한바탕 끝나고 도쿠가와는 문인통치 체제로 바꾸게 됩니다.그러면서 안정을 찾으며 이때 조선통신사도 오지요. 일본의 서민들은 먹고 살 만해져서 굉장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안정된 정치상황이 경제나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상공업의 발달은 새로운 유형의 시민계급을 탄생시킬 정도로 사회발전이 이루여 졌다. 이때 유럽미술의 유입으로 일본인들은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회상이 우끼요에에 그대로 반영되어 사대부의 산수화나 화조화 대신 풍속화, 미인도, 명소풍경, 가부끼의 주인공들 일반 서민들의 관심이 판화의 주제로 표현되었다
에도는 지금의 도쿄 이구요 16c에 시작되어서 18c 가 시작 될 무렵에는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됩니다. .사무라이를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 차례대로 농민-직인-상인을 두는 공식적인 사회계급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상인들은 가장 낮은 신분 이었음에도 직인계급과 함께 도시 생명력의 근원이 되며 이들은 조닌, 문자 그대로 ‘시가지의 주민’으로 불렀습니다. 에도시대를 통해 막대한 물질적 부의 축적과 함께 다양하고 독창적인 도시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러한 발흥은 각 지방들간의 그리고 외국에서 받은 자극을 통해 이루어 졌으며(일본은 멀게는 고분 시대부터 조선의 선진문화와 미술을 본받아 익혀 왔습니다. 앞서 조선통신사들도 얼마간 일본에 머물면서 우끼요에 판화를 일본의 토산품으로 구입해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16세기에 이르기 까지의 일본미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교리를 공고히 해왔는데 에도시대의 도시 성장은 부유한 조닌들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미술분야에 대해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 제동은 걸었습니다. 특히 에도,교토,오사카의 부유한 상공업 계층이 소유하고 있었던 경제력은 미술에 대한 쇼군의 지배권을 약화시켰으며, 이들은 스스로의 미적 선택을 통해 새로운 미술의 다양성을 이룩합니다. 서양의 부르주아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에도에서는 개인적인 교양의 증거로서 기예의 성취도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모든 계급의 남녀들은 한두 개 이상의 기예를 익혔습니다. 특히 음악 회화 서예 실내유희는 높은 대중적 인기와 지위를 차지했고 이러한 것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교양인들 사이에서도 높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뿌리내린 회화 시 서예의 밀접한 관계는 한국을 거쳐와 일본 미술에서도 특징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높은 위치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미적 취향을 위해서 저택장식을 위해.. 쇼군의 미술규범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금지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여러가지 자신들의 개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미술계의 경쟁은 날로 심해지고 하나의 미술 형식이 생존하기 위해서 관객층을 발견하고 유지하는 것 이 가장 기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시에는 우끼요에 판화 및 판본을 파는 우끼요에 가게가 많이 있었는데 그림의 양이 많아서 사람들이 몇번이고 되풀이 하여 꺼내 보아도 가게 는 싫어하는 낯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 물건이 정해지면 2~3장의 판화를 모아 적당하게 둘둘 말아 그 위에 가게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포장지를 덮어 바로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 동그란 통모양의 판화를 손에 쥐고 흥분된 가슴으로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있는데 이와 같이 우끼요에의 경우 유아 빛 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에도시대 어린아이들을 무시해서는 안될 고객층이었고 (지금의 유희왕카드) 12-13살 남자아이가 삽화화가들에 대한 비평을 할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낱장의 그림들은 그 당시 메밀국수 한 그릇의 가격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하여 아이들의 용돈으로 충분히 구매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쟁이 양식적인 절충과 함께 새로운 특성에 대한 탐구를 자극시켰습니다. 미술 작품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포장하고 상업화해야 했던 미술가들에게는 이것은 중요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술이 상품화 되면서 자연히 아마추어와 직업미술가의 지위문제도 중요하게 대두 됩니다. 에도시대에는 크게 교토 지역의 미술양식과 에도 지역의 미술양식이 조금 다르게 나타나는데교토는 황실이 거주하는 도시로 세련미를 유지시켰으며 이러한 유산을 갖지 못한 에도는 현대적 성격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로 인해 새로운 것에 민감하였다고 합니다. 교토와 에도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변해 갑니다. 교토의 번영과 특권적 지위는 18세기를 지나면서 다른 도시들(특히나 에도)에서 이루어진 상업과 문화의 발달에 직면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의 미술적,지적인 환경은 혁신적인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흡인력을 제공하며 어떤 이들은 과거에 이루어졌던 교토의 황실 미술의 유산으로부터,다른 이들은 중국과 서구의 새로운 미술부터 영감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토도 죽진 않았다… 할 수 있겠죠. 교토 미술의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판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교토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일본 판화의 황금기의 주역인 에도로 가겠습니다. 에도는 18세기 중여 천연색 목판화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하여 괄목할 만한 문화의 자율성을 갖추게 됩니다. 판화가 에도에서 생산되던 유일한 미술 형태는 아니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 판화였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량으로 생산되고 구매되었으며 덧없는 아름다룸을 노래한 판화는 일반적으로 우키요에 –덧없는 세상의 림으로 알려졌으며 에도 미술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부유한 조닌들 상공인들의 관심과 유행에 초점을 맟춰진 판화는 에도시대에 번성했던 많은 회화 양식들과 마찬가지로,16세기 교토에 처음 등장했던 회화형식에서부터 발전됩니다 이제 우키요에를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로코코 시대 그토록 열광적이었던 중국풍을 잠재우고 점차 은근한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한 일본문화의 열풍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파리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는 마치 20세기 초 많은 화가들이 아프리카 미술을 비롯한 원시미술에 열광한 것과 흡사하며 가장 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우키요에 일본판화 였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알려지기 시작하여 (공예품 포장지) 당시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력이 있는 콩쿠르 형제들이 수집하면서 일본 미술 유행이 시작되었고 만국박람회 통역차 왔던 하야시라는 사람은 가게를 열어 일본물건 들은 유럽에 소개하는데 하야시 가게에서 판매된 우키요에 작품은 15만 6487매에 이르렀다. 하야시가 가게를 차리기 전에도 이미 많은 일본가게가 있었으며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경쟁을 치열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유럽에 큰 영향을 끼친 우끼요에란 과연 무엇일까요? 분명히 우끼요에는 일본 전 지역에서 일어난 판화가 아닌 에도지역에서 만들어 진 것 으로 이미 일본 내에서도 에도 외의 다른 지역들이 에도의 특산품이었습니다.
우키요에는 우키요죠시라 하는 새로운 소석양식이 나타났다 우키요는 본래 어떤 의미내용을 담고있는 말이었을까요 이미 ‘우기요모노가타리’라 하는 소설 서문에서 단적으로 기술하고 있듯이 이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 고난의 삶이므로 우키요-걱정거리 많은 이 세상-이리고 표현되어 왔으나 에도에 이르러 한 치 앞이 캄캄한 힘든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더 현재 제일주의로 달,눈,단풍 놀이에 빠져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둥둥 뜬 기분으로 즐기며 잠시 동안만 머물 현세라면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살자 라는 긍정적 뉘앙스로 바뀌게 됩니다.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재 양식 또는 당세풍이라는 의미도 겸하게 됩니다. 분명히 우끼요에는 미술작품 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가장 신선한 단면을 보여 주는 현대의 매스미디어와 같은 정보 제공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우키요에라는 말이 언제나 무색 투명한 현재만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향락주의적인 인생관을 배경으로 음란한 호색의 분위기가 농후하게 감도는 현실이야말로 역시 우키요에의 세계에 가장 걸맞는 우키요 였다. 그런 의미에서 봉건적 제도의 강력한 구조적 틀에 규제당하고 비인간적인 도덕률에 속박당하던 그 무렵의 사람들이 무사와 조닌의 구별없이 그들 정념 또는 미의식을 자유롭게 펼칠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이 같은 유흥가.유곽 극장거리여싸. 이러한 유흥가 풍속을 바탕으로 미술과 문학 그리고 예능 분야에서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 졌다. 우끼요에 그림의 미녀들 만 보아도 잘 알수있는 사실이다.
판화의 발달 원인대중에게 보여지기 위해 제작된 것이므로 다량 생산이 필요칼에 의한 예리하고 긴장된 선 묘사 등 판화 자체가 같는 특이한 미의 발견
판화의 발달 과정1스미즈리에 – 먹색으로만 인쇄하는 판화로 흑색일변도의 윤곽선만 나타남2베니에- 스미즈리에 에 채색하는 판화특수한 안료와 재질을 이용해 풍부한 화면을 보여줌3우루시에-스미즈리에 위에 분홍 초록 등 2-3 가지 색의 색판을 겹쳐서 인쇄하는 판화 먹색으로 찍은 다음 안료에 아교를 섞어 채색하여 옻칠한 것처럼 광택이 나도록 표현4니키시에-1765년경 시작된 다색판화로 우끼요에의 황금기. 비단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으로 정교하고 화려한 다색판화로 홍.황.녹.자.색과 같은 여려 색을 칠하는 목판화
제작 과정은 www.youtube.com
작가 초기 우키요에 판화 기법개량자들
오쿠무라 마사노부 ,히시카와 모로노부니시카와 스케노부 중기스즈키 하루노부 중기 니키시에도슈사이 샤라쿠중기 배우그림
기타가와 우타마로후기 미인화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 가츠시카 호쿠사이후기 풍경화
가츠시카 호쿠사이 1760-1849
가츠시카는 지역이름이었다.호쿠사이는 굴곡많은 인생을 살았다. 이사 다닐 때 마다 작품스타일과 이름이 바뀌었으며무려 30회 이상 화명을 바꿨다고 한다.스스로를 농민이라고 자칭했는데 이를 통해 농민집안 출신이라고 추측한다또한 시노우사-혼죠-와리게스이-도키타로등 지역이름을 이름으로 썼다.그의 대표작은 후가쿠 산주록케이 후지산 36경이 있으며14-15살 때 서점 배달부 일을 하면서 일본 판화를 접하게 된다.19살 때 가츠카와 순쇼 문하에 들어가게 되며 본격적으로 회화 수업을 받게 된다.가츠카와 순쇼는 육필미인화전공이었다.이후 호쿠사이는 가츠카와 순로 라는 이름을 스승으로부터 받게 된다.20살 때 처녀작은 가부키였다.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다양한 화파들의 서양화와 중국화를 섭렵하게 된다.그리하여 가츠카와 화파에서 파문을 당하게 된다 파문 후 이름을 잃게 되어서 다와라야 쇼리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30대 후반에 호쿠사이라는 호를 사용한다. 이때부터 독자적 예술 행보가 시작되며 고난의 시기의 시작이다.평생 사는 동안 100가까이 이사를 하였다. 우리나라 작가 중 비슷하게는 추사 김정희가 있다 그 역시 화명을 200호 이상 바꿨다.그의 좌우명은 불염거 –내가 사는 곳에 물들지 않는다.가쿄진- 그림에 미친 화가로 불려주기를 원해다.
파문을 당하면서 까지 화풍의 범위를 넓혀서 작품세계가 다양해 졌다.가츠카와 화풍을 피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쿄카에혼 –미친 노래그림 책 1799동도유랑 1800
40대 에는 문학과 작품을 섞어서 유명한 막부의 쇼군 일대기의 내용을 다룬 친세츠 유미하리즈키 1811 29권 판화 소설집 을 만들게 된다.
그후 문학과 결별 50대 작품으로만 화집을 출간 화보 류의 호쿠사이 망가를 출간했다.그 후 70대에 그의 대표작 후지산 시리즈가 나오며 후지산 36경+후지산 뒷모습 10컷 =46경이며 풍경묘사의 사실적 표현을 이루어낸 최고 걸작이다. 후지산의 절경이 보이는 명소와 함께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 시리즈이다. 여느 산수화와는 달리 사람을 중심으로 한 풍경화로 당시 70세를 넘은 호쿠사이에 의해 처음 고안 되었다.근경의 기하학적 틀안에 윈경의 후지산이 갇혀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기이함을 과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각적 연구 끝에 실행된 것으로 호쿠사이 예술성의 폭과 깊이 느끼ㅔ 함.그 후 75세 때 후지산 100경을 그리며 그 뒤로는 누구나 알고있는 서양에서는 THE GREAT WAVE OF KANAKAWA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치해의 바다 시리즈를 연작 한다.이 그림을 보고 인상주의 작가인 드뷔시는 파도를 작곡 한다.그의 만화 작업은 지금 까지도 여러 애니매이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프랑스 애니매이션 감독인 미셸 오슬로 역시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준 인물로 호쿠사이를 말했다고 한다.
나는 5세때부터 사물의 형태를 스케치하는데 열중 하였다.50세때부터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70세 이전에 그린 그림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그림은 하나도 없다73세가 되어 새 동물 곤충 물고기의 진정한 특성과 초목의 중요한 본질을 약간 파악 하였다.따라서 80세가 되면 조금 더 진전 할테고 90세때는 사물의 의미를 훨씬 더 깊이 통찰할 것 이며 100세가 되면 참으로 놀라워 질테고 110세 때는 찍는 점 하나하나 긋는 선 하나하나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키요에가 서양미술에 미친 영향 - ‘자포니즘(Japonism)
19c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에서 일본의 공예품을 포장할 때 완충제 역할을 위해 종이를 넣었는데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우키요에였다. 포장지로 쓰인 우키요에 였지만, 유럽인들에게는 동양에서 온 신기한 물건으로 여겨져서 수집 대상이 되었다. 당시 미술가와 컬렉터들이 앞다투어 일본 미술품과 공예품을 수입해 먼저 넣기 위한 경쟁을 벌이던 일본문화의 열풍을 자포니즘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포니즘 열풍은 유행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 호기심이기도 했지만, 보수적인 미술계에 강한 반감을 지녔던 인상파 화가들처럼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던 안목의 소유자들이 일본미술에 잠재되어 있는 매력을 찾아내 널리 알린 것이 열풍의 도화선이 되었다.자포니즘(Japonism)의 형성 유럽에 유행했던 자포니즘은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주지한바 직접적 계기는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였다. 자포니즘이란 용어는 하나의 양식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양식을 대신하는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미술작품을 통해서 입증되는 유럽의 미술이 일본의 미술을 만남으로서 이루어낸 일본적 성향을 의미한다.
2) 자포니즘(Japonism)과 후기 인상파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회화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해 사물을 효과적 색채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우키요에는 어떤 정경을 조망 한 그대로 화가의 눈에 인상 깊은 부분만 잘라내어 화면에 그렸 다. 또한 색채는 밝고 평면적이며 표현성이 풍부해 인상주의에 무 엇보다 큰 영향을 주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우키요에의 회화적 특 징을 자신들의 그림에 반영하거나 공유하였다.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인 반 고흐(1853-1890) 또한 열광적 인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다. <(左) 탕기영감의 초상>의 배경은 후지산과 벚꽃나무와 일본 기 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의 우키요에로 빽빽이 들어차 있다. 특히 왼쪽에 있는 미인도 형식 우키요에는 현존하는 쿠니사다의 작품을 보고 그렸음을 알 수있다. <가메이도의 매화 : 플럼꽃이 피는 나무>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다리 : 비 내리는 다리> 우타가와 히로게시 : 빈센트 반 고흐 우타가와 히로게시 : 빈센트 반 고흐히로시게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한 그의 <매화나무>나 <다리>는 동양 회화식 표현을 빌리면, 반 고흐식 히로시게 모방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까지 애써 그려 넣은 그의 노력에서 그가 우키요에에서 받았을 깊은 인상과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을 반추할 수 있다.<기생> 왼쪽 그림은 우키요에의 그림 중 하나이고, 위에 있는 그림은 반 고흐가 우키요에 그림 중 기생을 소재로 그린 그림 중 하나 이다. 반 고흐의 작품에는 이 밖에도 우키요에를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키요에는 반 고흐와 같은 후기 인상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에두아르 마네 - 에밀졸라의 초상>에밀 졸라의 뒷배경에서 일본풍물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족자에 는 매화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가 그려져 있고, 스모선수를 주제 로 한 우키요에가 등장한다.<클로드 모네-일본여인 (기모노를 입은 모네의 부인)>모네는 자신의 정원에 일본식 다리가 있을 만큼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 취향이 강했다. 자신의 부인 카미유를 모델로 한 이 작품에서 카미유가 입고 있는 기모 노의 화려함과 부채가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는 그런 특징적인 표현법 중에서 자기 자신들만의 독특한 표현법을 만듦으로써 그들만의 독창적인 예술창조의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자포니즘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중심적 개념의 일부를 제공하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끼요에 제작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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