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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Photography&Media

일본 컨템포러리 아트 Dis-communication

by @artnstory 2007. 10. 9.

성곡미술관
http://www.sungkokmuseum.com

2007_1012 ▶ 2007_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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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요 토리미슈_인사이드 트렉_가변설치_2004
우선 배경에 대해 ● 베를린 장벽해체 이후 세계는 순식간에 급변했다. 그 때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이데올로기와 냉전구조는 붕괴되었고,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하면서 정보의 해제와 금융시장의 글로벌화가 시작되었다. 종전에는 국방통신시스템이었던 인터넷의 보급으로 일반대중의 커뮤니케이션의 방식도 일변했다. 경제의 자유화와 중국을 포함한 사회체제의 변화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졌으며, 물자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지구상 어디에 있어도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시차는 있지만 전자테크놀로지 덕분에 세계가 동시에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글로벌리즘 시대의 인간들은 지역 및 국경, 습관, 언어, 종교를 넘어 상호교환 가능한 매체들 속에서 산다. 인터넷 덕분에 매체들의 경계는 사라져 세계는 평면화되고 획일화되었다. New York, Tokyo, Seoul, Beijing에서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고, Amazon.com에 들어가 전 세계의 읽을거리를 다운로드하며,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즐기고, 음악과 영화를 다운받으면서 세계 어디서든지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글로벌화의 혜택으로 대다수의 현대인이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옷을 사며,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사고를 하면서, 비슷한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유일한 채널이던 미국의 지배가 종식되고, 테러와의 싸움으로 새로운 대립이 시작되었다. 세계 시장경제의 발전은 지역격차를 낳아 다수의 빈곤층이 출현했고, 인터넷을 이용한 국제범죄도 늘어났다. 결국 모든 것이 평등하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이 글로벌라이제이션 속에서 살며, 이미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불행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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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슈야 이시다_무제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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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의 증대 ● 우리는 예술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 급속히 진전되는 정보화 사회, 국제전의 증대, 광주 비엔날레를 위시해 부산 비엔날레, 베이징 비엔날레, 광저우 비엔날레, 칭다오 비엔날레, 싱가폴 비엔날레, 후쿠오카 비엔날레,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츠마리 트리엔날레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90년대부터 국제전이 급증한 것은 문화의 글로벌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민주화 운동과 국제전이 때를 같이 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흐름을 타면서, 아시아에 자유를 가져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문화의 국제화, 혹은 민주화는 앞에 언급한 이데올로기의 붕괴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증대에 의해, 예술가들의 작품이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세계화시켰다. 물론 지역 격차를 뛰어넘는 커뮤니케이션은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의 교환으로 가능해졌다. 팩시밀리나 전화, 편지와는 달리, 인터넷은 엑셀 수식과 PDF를 사용한 화상처리를 할 수 있으며, 비디오넷으로 만 배 이상의 정보를 순식간에 보낼 수도 있게 되어, 그 결과 세계는 수 초안에 확실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통신 속도의 발달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시간상의 이동개념에서 공간상의 이동개념으로 변화되었다. 시간에 대한 사고, 원근의 거리 개념을 소멸시켰고, 인터넷은 24시간 지구상에서 Google을 움직이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뿐만 아니라 휴대폰의 발달 또한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한층 증대시켰다. 지구상에서 교신되는 커뮤니케이션이 눈에 보이는 전자파라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의 전자파가 작열하는 천체일 것이다. 매일 원폭이나 수폭 이상의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증대가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예술 작품 역시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그 역할이 바뀌어, 작품의 표현은 강도 높은 메시지를 지니게 되었고, 보다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있으며, 사회환경의 문맥 안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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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보 아베_벨런스_나무, 아크릴_190×100×8cm
사회와 개인을 맺는 것 ● 이처럼 글로벌화된 매체가 넘쳐나는 생활 환경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예술을 통해 세계의 존재방식을 더 사유해 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에 네 명의 일본 예술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인간을 모티프로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마음의 균형(심정)을 테마로 하고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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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사사키_마리아8861_혼합재료, 아크릴_200×140×3cm
현재 New York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모요 도리미츠 ● 도리미츠의 작품 「Inside Track」 은 글로벌기업에 종사하는 기업가들, 세계를 무대로 일하는 기업전사의 모습을 한 오피스 워커 로봇(공업제품)이, 마루에서 네발로 기는 포복 자세로 전진한다. 이 작품은 기업의 최전선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샐러리맨을 전사의 모습으로 만들어, 전장(회사내부)을 이동한다. 어디에나 있는 듯한 그 전사들, 유머러스하며, 시니컬하게 보이는 Mr.Mark, Mr.Lee, Mr.Gunter는 비지니스를 시작한다. 이 작품은 광주 비엔날레(2004)에 출품한「Horizons」시리즈를 한층 발전시켜, 장소를 비지니스 오피스 안으로 옮겨 상황을 전개시키고 있다.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백 개 이상의 슈트를 입은 병사인물상, G.I.Joe들이 중동지역에 매장된 오일을 둘러싼 쟁탈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백 개의 샐러리맨 상들은 단 세 개의 배터리의 힘으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싸우는 전사(회사원)가 벽에 부딪치거나 백색의 빌딩을 들이받아 건물을 부수면서 전진해 간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비지니스는 중단된다. 넥타이는 단정히 매고 있으면서 하반신은 느슨하게 질질 끄는 자세, 뒷모습은 관람객들을 비추면서 그들을 웃을 수도 없게 한다. 그들 덕택에 천연자원을 지니지 못한 일본과 한국의 경제는 유지되며, 중동 원유의 혜택을 입어 우리의 매일의 생활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우리들은 비행기나 차에 타면서, 석유를 원료로 한 천을 이용한 옷을 입으면서, 생활의 전부를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며 산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백개의G.I.Joe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싶은 기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리미츠는 1990년대 도쿄에서 「미야타 지로」라는 샐러리맨 로봇을 만들었다. Made in Japan 의「미야타 지로」역시 일본에서 포복 전진하며 도쿄의 거리에서 활약한다. 사회적 지위를 지닌 기업전사 Mr.Mark, Mr.Lee, Mr.Gunter 그리고 MR.미야타는 글로벌라이제이션 속에서 살아 남는 아버지상이 되어 귀염성스런 기분과 증오스러움이 섞여, 비극의 드라마가 되어 우리에게 호소해 온다. 틀림없이 한국의 관객들도 이 로봇 기업가들을 보고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프간 인질사건은 이와 같은 중동의 유전 쟁탈전에서 비롯된 비극이었으며, 민간인이라고 할지라도 국가의 비극이 되는 상황을 우리는 연일 뉴스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도리미츠가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비극의 아버지 상이긴 하지만, 일벌레 인간이 인간적이고 씩씩하게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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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요 토리미슈_인사이드 트렉_가변설치_2004
데츠야 이시다 ● 데츠야 이시다는 2005년 도쿄 근교의 레지던스 타운인 마치다시에서 오다큐 전철 건널목 사고로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주기 추도 전람회에서 필자가 NHK일요 미술관의 책임프로듀서에게 소개하였고, 그 후 45분길이의 다큐멘터리가 제작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집(求龍堂출판)은 3만부가 팔렸으며, 많은 젊은 관객층이 이시다의 작품을 보고 오열했다. 그가 일상을 그린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생의 슬픔과 괴로움이라고 할 비통함을 안겨주었다. 이시다의 슬픔은 개인적인 비극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연일 보도되는 젊은 층의 이지메, 살인사건, 자살 등이 현대인의 비극을 보여준다. 전국 각지의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사건은 그치지 않는다. 소년의 목을 잘라 교문 앞에 놓는 범죄, 소년의 버스 하이잭, 인터넷에 살인을 예고하고 게임 감각으로 친구를 살해하고는, 다시 게임과 같이 리셋트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소녀도 있었다. 개인의 의사를 억누르는 획일화된 교육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비극을 접할 때 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력 우선의 사회,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리라. 행복도 불행도 사회의 제도에 의해 결정되는 집단 논리가 개인을 말살해, 그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자는 부정되고 만다. ● 이시다의 작품 「Analysis」(분해-1999)는 볼트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작가 자신이다. 볼트는 대량 생산되는 공업 제품이다. 사회의 인간들이 부품처럼 보였는지, 부품으로 이루어진 그의 집안은 황폐해진 비참한 양상을 표현한다. 도리미츠의 로봇역시 엘리트라고 불리는 고학력의 사회인을 상정하며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대량생산의 공업제품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충족될 수 없는 인간사회의 환경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이시다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소년 살인 사건의 뉴스를 들었을 때나 이지메로 자살한 소년 소녀들의 불행을 알았을 때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대다수의 현대인이 매일 겪는 인간의 슬픔, 애처로움과 닮은 감정이었다. 특히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회사나 학교와 같은 조직 안에서 관리되고 폐쇄된 개인주의가 철저히 지켜져 만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종교심이 희박해진 현대사회에서는 마음의 연대를 구할 수도 없이, 부모자식의 연대도, 사람들 사이의 신뢰 관계도 허약해져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부재화하는 자기” 혹은 “투명한 존재”임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현대일본사회가 일으킨 집단적 병폐인 것이다. 불행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무너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명이며 실감(현실)일 것이다. 이시다가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자신을 향한 또 한 사람의 내면의 타자에 바쳐진 경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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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슈야 이시다_브레이크업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1.8×73cm_1999

뉴보 아베 ● 뉴보 아베의 「self-portrait: 자화상」는 목조로 제작된 작품이다. 검은 색으로 칠한 평균대는 학교 체육시간에 쓰던 체육기구를 생각나게 한다. 그 평균대 위에 본인과 같은 인물이 균형을 잡고 한쪽 다리를 올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다. 검은 색으로 칠한 학교 평균대는 인간사회의 제도를 암시하면서, 불안정한 미지의 세계를 예측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베의 작품은 이시다와 같이 불안한 자신의 자화상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작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에는 검은 붕대가 감겨있어 표정을 알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관람자를 한층 불안하게 한다. 평균대 위에서는 미래를 볼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양 팔을 올리고 평균대(사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떨고 있는 듯 하다. 발끝은 극명하게 새겨져 착지점이 안정감 있게 보인다. 이 작품은 머리에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진다. 관객은 볼 수 없지만 작품 위에서 보는 시점을 상정해 만들어진 얼굴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그 시선을 아프도록 느낀다. 아래로부터 쳐다보면 높이 나는 새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보는 사람에게 균형을 요구한다. 같은 경향의 작품 「Balance」도 마찬가지로 균형을 잡은 자화상과 같지만, 잘 보면 머리가 없다. 양팔을 벌린 머리가 없는 소년과 같은 형태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상과 같다. 한쪽 구두는 벗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의 구두 한 짝을 어딘가에 감추었음에 틀림없다. 이지메를 당한 소년처럼 괴로워 보이기도 한다. 아베가 추구한 커뮤니케이션은 사회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과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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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보 아베_자화상_나무, 아크릴_100×180×60cm

리카 사사키 ● 리카 사사키의 작품 표현은 도리미츠, 이시다, 아베의 작품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의 세 작가의 작품의 배경으로, 세 사람의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뇌, 사람들의 감정이나 이성적 감각을 조작하는 뇌(=마음)를 제시했다. 사사키는 자신의 뇌를 스캔해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한다. 실리콘으로 뇌를 만들어 찍어 확대하거나, 변형시킨 사진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전시에서 마음의 문제를 물으면서 마음의 소재를 생각해 본다. 대뇌와 소뇌, 우뇌와 좌뇌와 같이 뇌는 몇 개의 세포로 연계되어 감정 조작을 신호로 바꾸어 전달한다. 슬픔이나 기쁨이 신호가 되어 마치 통신 시스템과 같이 감정을 전한다. 뇌세포는 시각을 이미지로 상상하거나, 언어를 기억하거나, 계산을 처리하거나, 상황을 구성하고 편집하는 기능 등, 그 어떤 슈퍼컴퓨터에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사키의 작품은 인간의 처리 능력을 지닌 뇌, 복잡하고 단층이 몇 겹이나 겹쳐진 뇌 그 자체를 보여준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우리가 매스미디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사사키가 원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우리 자신을 컨트롤하는 기능, 뇌 자체가 감정을 지닌 인간적인 부분에서 기능만을 시각화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뇌(=마음)가 시스템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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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Dis-communication ● 이번 전시의 컨셉인Dis-communication은 현대사회에서 글로벌화에 따라 일어나는 소통의 부재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메시지이다. Dis-communication은 통신수단의 발달과 미디어의 진화로 인해 정보화 사회 속에서 사라져가는 소통, 인간의 감정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슬픔, 괴로움, 기쁨, 유머, 냉소가 교차하는 인간 마음의 정보,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이 네 명의 예술가들에게 공통된 태도와 의식은 냉소와 유머로 이 현대사회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들 역시 그들과 같이 도시에 사는 의식을 가진 가해자이며 피해자이기도 한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그들의 통찰력은 사회라는 인간세상에서의 개인, 또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 세계 속에 속한 한 개인과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아픔을 묻는다. 이번 〈Dis-communication〉전이 일본의 예술가들을 모두 한국에 소개하는 전시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도 역시 글로벌라이제이션 속에서 또 인터넷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여기에 소개하는 예술가들의 메시지는 한국인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의식으로서의 소통의 기능을 할 것이라 믿는다. ■ 유조 우에다 (김혜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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