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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Photography&Media

~베로니카 베일리展 / VERONICA BAILEY / photography

by @artnstory 2008. 4. 25.

2 Willow Road & Postscript
2008_0424 ▶ 2008_0524
가인갤러리_GAAIN GALLERY
www.gaain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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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의 해석에 있어 기호학을 접목한 미술사학자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사진에서 초점이 맞은 선명한 이미지는 형상적이고 초점 밖에 있는 이미지는 비형상적이라고 구분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형상이 부재한 이미지(imageless image)야말로 상상력과 이야기를 지닌 ‘담론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랜 기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힘써온 사진은 그간 형상적인 것에 우위를 두어 왔으나, 더 이상 실재의 복사물로서 복무하지 않는 오늘날의 사진은 굳이 초점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떠나 형상적인 것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며 사람들은 그 의도를 읽어내고자 한다. ● 영국 출신 사진작가 베로니카 베일리(Veronica Bailey, 1965- )의 사진은 대부분 노만 브라이슨의 구분에 의하면 초점이 잘 맞은 형상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책이나 편지의 미세한 종이 질감까지 포착할 정도로 선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상이 본래 지닌 기하학적인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초점과 상관없이 추상적이고 비형상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이미지 너머에 풍부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다. 이처럼 형상적인 동시에 비형상적인 베일리의 사진은 저마다의 해석과 상상력을 열어 둔 일종의 시각기호로서 수용자에게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시각기호에 제목이라는 언어기호가 개입됨으로써 다층적인 의미작용을 생산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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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리의 대표적 사진연작 「2 Willow Road」(2003)로 부터 시작해보자. 이 사진들은 수직으로 세워진 책의 낱장들이 확대된 이미지다. 대상에 밀착된 카메라로 인해 종이의 재질과 닳아진 상태까지 부각되는 이 사진은 분명 형상적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또한 책이 놓인 각도, 두께와 색이 대조되는 표지와 낱장의 조합, 종이들의 갈라진 지점과 벌어진 정도 등에 따라 미묘한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내는 각각의 사진은 조금씩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직적 패턴이다. 대부분의 사진이 - 몇몇은 책 안쪽의 삽화나 글씨가 살짝 보이기도 하나 - 수 겹의 종이 모서리가 만들어내는 직선만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2 Willow Road」는 대상이 지닌 물리적 현존만으로 그 자체 형상적이면서 동시에 비형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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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illow Road」의 진정한 묘미는 제목이 개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차적으로 사람들은 「2 Willow Road」라는 제목 - 우리말로 ‘버드나무 2길’ 정도에 해당하는 - 에서 ‘길(road)’이라는 낱말의 함의와 수직적 형태의 이미지를 연관시켜 파악하고자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개별 사진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이미지와의 또 다른 상관관계를 떠올릴 것이다. 「높은 빌딩에 대한 인간의 반응」 혹은 「긴 의자에서 바라 본 장면」과 같은 제목에서는 ‘길’이 아닌 ‘빌딩’이나 ‘긴 의자’가 가진 또 다른 재현적 함의를 이미지와 연관 짓다가 「권력의 거만함 」, 「예술 안에서의 여성」, 「나와 같은 소녀」 등의 추상적인 제목을 만나는 순간 제목과 이미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러다가 「러시아 아방가드르드 예술」, 「최고의 전쟁사진」, 「헝가리 요리책」 등의 구체적인 단어가 등장하거나 「골드핑거」, 「만 레이」, 「본질적인 르 코르뷔지에」 등의 인명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이들 사진의 제목이 곧 사진 속 책의 제목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 이 책들은 모두 근대 건축가 에르노 골드핑거(1902-1987)의 개인 서가에 꽂혀 있는 것들로 그 제목의 면면에서 인물의 취향과 관심사, 나아가 삶의 궤적과 인간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먼저 연작 전체의 제목인 ‘2 Willow Road’는 런던 햄스테드(Hamstead)에 위치한 - 국보로 지정된 - 골드핑거의 주택의 이름이다. 베일리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며 그곳의 책들을 찍었다. 헝가리 출신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였던 골드핑거는 1929년경부터 파리에서 수학하며 르 코르뷔지에나 만 레이 같은 파리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예술가인 우르슬라 블랙웰(Ursula Blackwell)과 결혼하여 1934년 영국으로 건너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햄스테드 지역에 근대건축 양식으로 3채의 ‘Willow Road’ 주택을 지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2 Willow Road’에서 부인과 함께 살다 생을 마쳤다. 위에 나열한 「2 Willow Road」 사진의 제목들은 이렇듯 골드핑거라는 인물을 알아갈수록 수수께끼가 풀리듯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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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골드핑거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도 「2 Willow Road」는 그 자체로 다층적인 의미작용이 가능하다. 공통된 기하학적인 패턴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초상사진의 얼굴과 이름을 대입시키듯, 책의 이미지와 제목을 대조해 가면서 저마다의 관점에서 사진들을 읽어낸다. 때로는 자신의 느낌과 제목이 기가 막히게 일치하기도 하며 때로는 불일치하기도 한다. 사실상 이 사진들은 베일리가 골드핑거의 책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 자신이 느낌대로 제목과 어울리도록 책의 형태를 만들고 화면을 구성하여 찍은 것이므로 베일리가 파악한 골드핑거의 책 제목에 관한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일리의 주관적 인상에 의한 기호화일 뿐 수용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예컨대 검정 배경에 붉고 흰 책의 낱장들이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예술 안에서의 여성」을 보고 누군가 도도하면서 에로틱한 여성의 느낌을 받았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베일리의 본래 의도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베일리의 모든 사진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의해 저마다 다르게 파악되며 그 사람의 상상력과 선입견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베일리의 사진의 매력은 이처럼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무한히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른바 열린 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베일리의 또 다른 주요 사진연작인 「Postscript」(2005)는 「2 Willow Road」와 여러 면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그녀만의 예술적 특징을 더욱 공고히 한다. 개봉된 편지가 봉투 안에 들어있는 형상을 찍은 이 사진들은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접히고 벌어진 종이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로 인해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추상의 인상을 준다. 그러나 급하게 찢겨진 편지봉투의 파편과 낡은 종이의 질감, 글씨와 우표 등 보다 상세한 부분이 재현되어 형상적 이미지가 보다 강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적 이미지 역시 편지의 정보를 담고 있는 대부분이 초점에서 벗어나 - 노만 브라이슨의 구분대로 - 이미지의 형태에 집중하게 되므로, 한편으로 비형상적이며 그만큼 많은 담론적인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알아보기 쉬운 대상의 이미지와 ‘추신’이라는 뜻의 전체 제목, 그리고 추신에 해당하는 어구인 「잘 자요 내사랑」, 「내 모든 사랑을」, 「당신을 그리워하며」 등의 개별 사진의 제목으로 인해 사진의 해독은 훨씬 용이하다. 이미지와 제목으로부터 누구든지 쉽게 이 사진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 또한 제목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 역시 보다 직접적인 편이다. 예컨대 「잠을 깨우는 키스」라는 제목의 가로 형태의 사진은 위 아래로 살짝 벌어진 봉투의 형상으로 인해 그야말로 가벼운 키스를 연상케 하며(사실상 이 제목은 전쟁 기간 중 밀러가 「보그(Vogue)」에 보낸 기사 중 파리의 독립을 잠을 깨우는 키스로 묘사한 부분에서 따온 것이지만), 「사랑해」라는 제목의 사진의 경우에는 봉투가 좌우로 벌어진 모습이 심장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구체적으로 재현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사진들 이외의 다른 대부분의 사진도 달콤한 제목과 파스텔 톤의 봉투 색깔, 그리고 전체적으로 안쪽이 보일 듯 말 듯 벌어져 있는 모습에서 에로틱한 은밀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개인적인 감상일뿐 보는 사람 마다 다른 심상을 떠올리고 다른 인상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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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script」 역시 「2 Willow Road」와 마찬가지로 제목과 이미지 너머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Postscript」의 편지 대부분은 미국 출신 사진작가 리 밀러(Lee Miller, 1907-1977)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된 초현실주의 예술가 롤란드 펜로즈(Roland Penrose, 1900-1984)와 주고 받은 것들이다. 모델로 사진계에 입문한 밀러는 초상사진과 패션사진을 주로 찍다가 「보그」의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일하던 중, 전쟁발발 후 종군기자로 참여하여 유럽의 중요한 격전지를 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 편지들은 주로 1937년부터 1945년 사이에 파리, 아테네, 카이로, 생 말로 등지에 머물던 밀러와 런던에 있는 펜로즈 사이에 오고 간 것들로 그 제목으로부터 당시 상황과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베일리는 동 서세스(East Sussex) 지역의 팔리 농장(Farley Farm)에 위치한 리 밀러 아카이브(The Lee Miller Archive)의 허가를 받아 그 곳에 보관된 편지들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삼았다. ● 흥미롭게도 베일리의 밀러에 대한 관심은 전작인 「2 Willow Road」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가 골드핑거의 ‘2 Willow Road’에 머물면서 발견한 - 골드핑거의 친구였던 - 펜로즈가 밀러의 사진을 콜라주 해 만든 작품 「진정한 여인(The Real Woman)」이 단초가 된 것이다. 피카소, 만 레이, 미로, 타피에스 등의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으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밀러의 작가로서의 면모 - 베일리의 「Postscrip」는 사막을 찍은 밀러의 사진 「공간의 초상(A Portrait of space)」(1937)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 와 세계대전 당시 여성 종군기자로서의 활약상, 그리고 한 남자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여자로서의 삶까지 베일리에게 밀러는 작품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밀러의 흔적이 담긴 여러 물건 중 베일리는 가장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편지를 선택했고, 각각의 편지에 대한 자신의 인상대로 그것들을 입체적 형태로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어두운 배경에 놓인 편지들은 마치 베일리가 간접적으로 포착한 밀러의 초상사진을 보는 듯 조금씩 다른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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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onica Bailey_Go Germanywards_람다 프린트_2005

이처럼 베일리의 사진은 과거 누군가에게 속했던 특정한 사물을 통해 그 사람의 현존을 증명한다. 「2 Willow Road」의 책과 「Postscript」의 편지는 각각 골드핑거와 밀러라는 20세기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으로서 그 사람 개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 심지어 당시의 시대상황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모든 작업은 항상 관계에 관한 것이다”는 베일리 자신의 말처럼 그녀의 사진은 외형적 아름다움 외에 엄청나게 풍부한 텍스트로서 가치를 갖는다. 선적인 추상으로 인한 간결한 이미지 너머로 제목이 주는 암시와 함께 호기심을 끈을 놓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계와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베일리의 책과 편지가 닫혀져 있는 것은 이미지 뒤에 가려진 텍스트의 풍요로운 의미작용을 알리는 단서일지 모른다. 이렇듯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은 베일리의 사진은 형상적인 것 너머 담론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사진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신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