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칭의 유래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가 1910~1911년 겨울, 런던에서 기획한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이라는 전시회의 표제에서 유래했다. 이후 이 명칭은 종합주의자, 신인상주의자 등 잡다한 명칭으로 불리던 모든 새로운 세대를 통칭하는 용어가 된다.
2. 후기 인상주의의 성립과정
1870년대 이후 인상주의가 국제적 경향으로 확산되면서 이후 등장하는 미술은 필연적으로 인상주의를 의식하게 된다.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은 보다 혁신적인 경향을 수반하며, 인상주의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후기 인상주의는 순간적, 감각적 자연의 인상과 빛의 변화를 화면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인상주의가 외형적 면에서 치중하고 너무 무질서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사물의 내면적 정신성과 본질을 근원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사물을 견고한 형태로 재현해 질서을 부여했고, 형태의 리듬과 열정적인 색채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냄으로서 20세기의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
3. 신인상주의
인상주의에 문제의식을 제기했다는 공통된 입장과 시기적으로도 같아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 신인상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과 기법에 의해 따로 신인상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 특성과 무정형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고전미술, 이집트, 비잔틴 미술에서 제시된 장중함과 초월적인 형식미를 작품에 부여하려 했다. ‘신인상주의’라는 명칭은 평론가 페네옹의 쇠라 작품에 대한 글에서 유래되었다. 순수한 색만으로 이루어진 색점들을 병치하는 방법(점묘법 ,또는 분할법)으로 색채를 표현, 색상의 순도를 유지하면서 관객의 시각에 작용해 중간색을 인식하게끔 유도했다. 쇠라, 시냑 등이 대표적 작가이다.
4. 고갱, 반고흐, 세잔 그리고 다른 화가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체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풍경과 이국적 풍경 같은 외형적 요소를 자신의 내면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도시로 대표되는 서구사회의 물질적, 기술적 발전에 대한 회의에서 이들은 시골이나 서양이 아닌 곳으로 떠나 자연자체와 이국적 지역의 순수하고 원시적인 모습에 매료되었다.
고갱은 이국적 풍경과 자신의 상상력, 개인적인 경험 등을 혼합하는 종합주의 또는 절충주의로 단순히 회화적 기법에 국한된 작가가 아니라 근대적 입장에 선 화가임이 드러난다.
반 고흐는 일본 목판화에서 큰 충격을 받고, 회화가 갖는 본질적인 속성-평면성을 자각하게 된다. 뚜렷한 윤곽선과 평평한 색채, 휘몰아치는 것 같은 붓터치는 화면의 회화적 리얼리티와 작가의 내면적 감정을 동시에 드러낸다.
세잔은 자연에 내재된 영원한 구조와 사물의 견고하고 지속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에서 표현 대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하려 했다. 자연의 형태를 원통, 원추, 공모양으로 단순화함으로서 절대적 형태를 추구했다. 이러한 시도에서 복수시점이 등장해 원근법이 사라지고,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 모습이 하나의 화면에서 재배치됨으로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여기서 제시된 세잔의 파사주(Passage)기법은 이후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5. 후기인상주의의 의의
후기 인상주의는 외부세계의 재현보다 내부적 질서의 불변하는 구조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서 대상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주관적 느낌이나 내면의 표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고갱과 반 고흐, 세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성향은 회화의 독자성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회화가 외부세계의 재현물이라는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회화자체의 속성인 2차원적 평면의 색채와 형태, 선의 조형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현대미술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추상미술과 직결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1. 인상주의 명칭의 유래
1873년 비평가 르루아는 모네의 <해돋이, 인상>(1872-73)을 보고 조롱 섞인 말투로 잡지인『샤리바리』에 인상파 전시회라는 전시평을 썼다. 여기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유래한다.
2. 인상주의의 성립 과정
쿠르베와 마네가 당대의 현실(19세기 프랑스)과 회화적 현실(물감이 칠해진 2차원적 평면이라는 점)을 그림으로 끌어들여 파란을 일으킨 후, 새로운 미술적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바지유, 모네, 피사로, 드가 등은 1860년대 중반부터 마네의 주도하에 바티뇰가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된다. 프랑스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미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던 이들은 자연과 삶의 단편들을 과학적 태도에 입각해 묘사하려 했다.
3. 자포니즘의 영향
1867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목판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인상주의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활발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히로시게, 우타마로, 호쿠사이 등등이 그린 판화는 마네, 모네, 피사로, 등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고갱, 반 고흐에게도 영향력을 파급시켰다. 일본 판화의 평면성과 원색, 나무나 난간에 의해 화면을 잘라내는 방식 등은 서양미술의 보수성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4. 사진의 영향
1859년 사진이 처음으로 살롱전에서 전시된다. 사진이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유했음을 드러내는 사실이다. 회화의 막강한 경쟁자가 된 사진은 시각적 현실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을 카메라의 초점과 같은 광학적 현상으로 연결시켰다. 아울러 화가들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도구로 사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최초의 인상주의 그룹전이 사진가인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개최된 사실은 인상주의와 사진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제시한다.
5. 인상주의의 특성
인상주의자들은 관찰과 경험을 통해 시각적 현실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이를 화면에서 재현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시각적 현실, 즉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인상주의가 당대를 화면에 담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된 19세기 사회는 근대화가 가져온 산물들-기차, 도시인들의 여가생활, 정비된 도시대로 등에 긍정적 입장을 가졌던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도시의 관찰자로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적이고 우연한 시선을 그림에 담았다. 따라서 이전의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설명적이고 서술적인 묘사는 사라지고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삶의 한 순간이 주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성향에서 스케치풍의 붓터치가 사용되고 원근법은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색채학 연구에서 영향 받아 보색대비가 채색에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주의(Realism)
서양미술사에서 사실주의는 항상 중요한 문제였다.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춘 사실적 묘사가 중시되었지만, 자연을 정확하게 모방한다는 방법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이다. 사실 19세기의 사실주의 이전의 미술가들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미화하거나 과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그대로 정확하게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9세기 초 이후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장단점을 고루 깨닫고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미술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대의 신화나 역사 대신 당시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다루게 된다. 사실주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근대시민사회를 세운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실주의 미술가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고대신화나 영웅이야기 대신 당대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쿠르베(Courbet, 1819-77)
쿠르베는 사실주의 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다. 1848년의 파리 혁명 등 프랑스의 혼란한 사회변동을 목격하면서 그는 현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쿠르베는 신화나 역사를 다루는 관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미술에 반대하였다. 그가 한 말인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는 사실주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쿠르베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미술소재를 찾았다. 시골의 장례식, 일하는 노동자, 작업 중인 화가 등이 그의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러한 그림에 대해 저속하고 천박하다고 비난을 퍼부었으나 쿠르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돌 깨는 인부들>(1849년, 드레스덴미술관, 독일 드레스덴, 2차 대전 때 파괴됨)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당대에 충격을 던졌다. 당시 사람들은 천한 노동자와 그들의 비참한 현실이 그림에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쿠르베는 자신이 살고, 보고 있는 현실 자체를 그린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주제의 혁신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화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인상주의로 가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도미에(Daumier, 1808-79)
도미에는 생계를 위해 파리에서 주로 신문 삽화가로 일했고, 말년에 이르러서야 회화를 그렸다. 그는 사회 지배층의 위선을 풍자하는 캐리커쳐를 많이 그려, 황제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또한 도미에는 도시의 일상생활에 대한 묘사를 통해 외롭고 지친 도시인들의 모습을 예리하게 표현했다.
<삼등 열차>(1862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국 뉴욕)는 허름한 열차 안에 비좁게 끼어 앉은 노동자 계층을 묘사한 작품이다. 생활에 지쳐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은 열차라는 그 당시의 최신 교통수단이 상징하는 기계문명 시대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고 있다.
바르비종 화파
실제의 자연풍경을 그렸던 컨스터블의 영향은 바다 건너 프랑스에도 미쳤다. 1830년경부터 한 무리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아래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는 등 그림을 그렸다. 이들을 바르비종 화파라 부르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코로와 밀레다.
-밀레(Millet, 1814-75)
밀레에게 있어 컨스터블의 영향은 풍경에서 인물로 확대되었다. 밀레는 농부들의 진실한 모습과 일하는 장면에 주목했다. 이전의 그림들에서 농부는 대부분 얼빠지고 우둔한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밀레는 자연 속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들에서 농부는 위대한 영웅이나 성인에 뒤지지 않는 고귀하고 위엄있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8x111cm,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은 강인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밀레는 햇볕이 쏟아지는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을 단순하면서도 단단한 신체의 소유자로 표현하고 구성은 단순하시켜 화면 전체에 엄숙함을 띠게 했다.
2)마네(Manet, 1832-83)
근대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네는 쿠르베가 주창한 사실주의를 발전시켜 인상주의와 연결시켰다. 쿠르베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옮기는데 열중해, 기법과 표현 방식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점을 뒷받침한 사람이 마네이다. 마네는 쿠르베의 주장에 동의했지만, 이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회화기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1839년 다게르(Daguerre, 1787-1851)가 사진의 발명을 공식함으로서 대상을 똑같이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네는 회화라는 것 자체의 사실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는 광선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발견해 그림에 적용했다. 묘사에 있어서는 세밀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빠르고 즉흥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은 화면을 평평하게 보이게 했다. 그때까지의 회화는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하여 3차원적 입체감을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은 관객에게 색면으로 뒤덮인 평평한 표면 자체를 보게 함으로서 회화라는 것이 원래 평면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한다. 이러한 회화의 본질자체에 대한 주목이 바로 근대회화의 출발점이다.
그림주제에 있어서도 마네는 파격적이었다.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옛 거장들의 작품들을 연구해 자신의 작품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상화된 인물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다. 전통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은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매년 열리던 프랑스의 공식적인 미술전인 살롱(Salon)전에서 마네의 작품은 번번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살롱전의 정해진 규범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던 미술가들에게 마네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풀밭위의 점심>(1863년,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은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인 라파엘로의 작품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 그림은 삼각형 구도, 원근법과 같은 고전적인 회화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묘사된 인물은 전혀 고전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옷을 입은 남자와 같이 있는 누드의 여인은 너무나 현실적인 외형을 하고 있고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고전적 기법에 의해 그려진 여신의 누드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경악했다. 마네는 부도덕하고 그림솜씨도 형편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미술을 밀고 나가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열었다.
낭만주의(Romanticism)
우리는 대체로 예술가가 내면의 감정과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가상이 일반화된건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이래 산업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더이상 바깥세계만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면서부터인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근대적 예술가이다. 이러한 예술가는 바로 낭만주의시대에 등장한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근대적 예술가와 근대적 예술관을 파생시킨 토대라 볼 수 있다.특히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고 각 개인의 주관을 존중하는 관용의 태도의 탄생은 낭만주의가 서양 사회에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특성이다.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에 반발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특정한 예술사조가 아니라 기존의 관습, 질서에 반발하여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19세기 초에 이러한 태도가 하나의 사조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신고전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된 계몽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성과 합리주의에 가려져 있던 인간 본연의 모습에 눈을 돌리고, 예술이란 사실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성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들라크루아가 말한 ‘고귀한 야만인’을 이상적 인간으로 숭배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바로 ‘고귀한 야만인’이었다. 그에 따라 각 개인의 주관적 의지에 대한 존중과 자신과 다른 사상과 종교에 대한 관용의 태도가 본격적으로 대두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그림 주제도 개인의 주관적 감정, 자유, 사랑, 이국에 대한 동경, 야생에 대한 관심 등이 되었다.
우리말로 낭만주의로 번역되는 로맨티시즘은 중세시대에 이야기를 뜻하는 로망스(Romance)에서 나왔다. 명칭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는 문학, 중세시대와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론 19세기의 미술사조 대부분이 문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아예 문학을 영감의 주요 공급처로 삼았고, 낭만주의 문학가들 역시 미술에 관심을 갖고 미술 이론과 비평을 쓰기도 했다. 들라크루아와 보들레르의 교류가 그 대표적 예이다. 또한 이들은 이성과 질서의 시대인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 즉 중세에 관심을 보였다. 중세에 대한 관심은 미술에만 해당되지 않고 문학, 건축 등 문화 전체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문학, 중세시대와 더불어 낭만주의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자연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이 갖는 초월성과 위대함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낭만주의 미술의 이러한 특징은 화면에서는 격렬한 움직임, 강렬한 정서, 선보다는 색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었다.
a.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
제리코(Gericault, 1791-1824)
프랑스 낭만주의 선구자인 제리코는 생애 자체가 낭만주의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살았다. 제리코의 낭만주의는 옛날 이야기나 먼 외국의 풍경이 아니라 비참하고 모순에 찬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메두사호의 뗏목, 1818-19년, 루브르미술관, 프랑스 파리)은 제리코의 이러한 미술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당시 매우 큰 해양사고였던 메두사호 사건이다. 항해 중 조난을 당하자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149명의 승객을 임시로 만든 뗏목에 타게 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리하여 승객들은 12일동안 물과 식량도 없이 바다한가운데서 표류하며 비참한 고통을 겪었다. 구조되었을 때 생존자는 겨우 15명이었던 것이다.
제리코는 이 사건을 치밀히 조사했고 정확한 묘사를 위해 부패한 시체, 처형당한 죄수들, 정신병자들을 직접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에서 제작된 이 그림에서 제리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승객들의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 쓰러져 있거나 안간힘을 다해 구조를 요청하는 승객들의 모습은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처절하고 사실적이다. 제리코의 이러한 생생한 묘사와 비판적 태도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 이 사건의 갖는 심각성을 충격적으로 환기시켰다.
들라크루아(Delacroix, 1799-1863)
제리코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후 프랑스 낭만주의는 들라크루아가 이끌게 되었다. 열정적 기질의 소유자였던 들라크루아는 앵그르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에 맞서 인간의 자유로운 정열이야말로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림의 소재를 주로 문학에서 많이 가져왔다. 들라크루아 자신도 문학에 소질이 있었고, 시인이었던 보들레르와 아주 친한 사이로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의 미술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가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강한 열정이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폭력 장면과 격렬한 움직임이 표현된 것이 많다. 또한 강렬한 색채가 번뜩인다. 들라크루아는 선의 사용 없이 색채만으로 회화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판 고흐, 드가, 세잔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년,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 파리)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앗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전쟁에 패하자 신하들에게 자신의 후궁들과 말을 죽이라고 한 후 자살한다. 들라크루아는 후궁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붉은 색을 배경으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인체들이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선명한 색, 연극적인 조명, 대담한 붓칠이 이 장면의 강렬함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b. 영국 낭만주의 미술
영국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은 시인 바이런이었다. 그의 생애는 낭만주의가 지향했던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잘생긴 용모로 방탕한 생활을 보내던 바이런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젊은 나이에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내면의 열정에 따라 안락한 생활을 박차고 나아가 험난한 인생행로를 스스로 택한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낭만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바이런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영국 낭만주의는 평온한 삶의 모습보다는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자연과 삶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밀턴, 세익스피어 등의 문학이 자주 그림의 주제로 등장하였다.
퓌슬리(Henry Fuseli, 1741-1825)
원래는 스위스인이었던 퓌슬리는 영국에서 주로 활동을 함으로서 영국의 중요한 화가로 자리잡았다. 퓌슬리는 로마여행을 통해 고대의 유적이 풍기는 황량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매료되어 이러한 느낌을 그림으로 남김으로서(<고대의 유물앞에서 감동하는 화가>, 1778-79) 블레이크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인간 내면의 광기와 공포를 드러내는 환상적 분위기의 회화를 제작했고, 세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시인이자 화가였던 블레이크는 스스로가 신비로운 영혼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관념적인 세계에 매료되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밀턴의 실락원, 구약성서, 단테의 신곡 등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블레이크는 정식 미술 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고전 미술 특히 미켈란젤로에게 감화되어 자신의 회화 작품은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회화에서 인물들은 무게감과 근육이 강조되어 입체적 느낌이 강하고, 색채의 사용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컨스터블(Constable, 1776-1837)
컨스터블은 터너와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풍경화가다. 그는 영국의 시골태생으로 황무지와 숲 속을 쏘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경험은 평생 동안 컨스터블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컨스터블은 특히 하늘을 보며 날씨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영국의 시골풍경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렸다. 즉 야외에서 실제풍경을 보고 풍경화를 그렸던 것이다. 이러한 야외제작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당시 대부분의 풍경화가들은 실제풍경보다는 전통과 관습에 따라 이상화된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건초마차>(1821년, 국립미술관, 영국 런던)에서 컨스터블은 생생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날씨를 짐작하게 할 만큼 사실적이다. 농부와 건초마차는 자연스럽게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자연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색을 칠하면서도 그는 물감을 섞지 않고 각 색을 점으로 찍어 색을 내는 것이 더 선명하고 자연의 색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터너(Turner, 1775-1851)
터너도 컨스터블처럼 실제풍경에 대한 관찰을 그림으로 나타냈지만 관심의 방향이 달랐다. 컨스터블이 조용한 시골풍경을 선호한 것과 다르게 터너는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야생의 자연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터너의 풍경화는 험한 산, 안개로 뒤덮인 들판, 폭풍우치는 바다를 펼쳐보인다. 이러한 풍경에 걸맞는 색채 표현 방식을 쫓다가 터너의 그림은 점점 추상화처럼 변해 가게 된다. 그는 유화제작에서 갈색이나 황토색 애벌칠 대신 하얀색 바탕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따라서 터너의 그림은 이전 그림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느낌을 내게 되었다.
<눈보라 속의 증기선>(1842년, 캔버스에 유채, 91.5x122cm, 테이트갤러리, 영국 런던)에서 터너는 대기와 바람, 증기까지도 표현의 영역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그속에서 버티고 있는 증기선은 대담한 구도와 색채로 거대한 자연의 힘을 느끼게 한다. 터너는 자연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터너의 이러한 대담한 표현방식은 말년에 이를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 그의 말년 작품들은 형상은 사라지고 색채의 대한 탐구로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c. 독일 낭만주의 미술
독일 낭만주의는 사실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다. 다만 이 지역은 문학과의 친밀도가 월등히 높아, 미술의 독자적 흐름이 더디게 형성되었다. 독일 낭만주의 미술은 독일 특유의 음울한 정서와 민족주의, 극도로 관념적인 양상에서 문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대표작가로는 프리드리히, 룽게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 미술가들 중에서도 고요하고 신비스런 풍경과 개인의 내면세계를 연결시킨 작품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개인적 성향 자체가 내향적이고 고독을 즐겼던 프리드리히는 기이하고 관념적인 자연풍경을 통해 내면의 적막과 음울함, 환상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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