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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Link/Art News

탄생 100돌, 세계적 기념행사 준비하는 파리 브레송 재단

by @artnstory 2008. 1. 24.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8년 8월 프랑스 파리 근교 샹틀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박스 브라우니’ 같은 싸구려 카메라뿐만 아니라 뷰카메라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화가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회화였다. 19살에는 입체파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앙드레 로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초현실주의 화풍에 빠져들었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로트는 카메라 없는 사진선생이었다”라고 회상하곤 했다. 20대 초반, 아프리카에 체류할 땐 사냥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는데 사냥을 통해 훗날 사진촬영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1931년 여전히 초현실주의를 탐닉하던 그는 한 장의 사진과 마주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헝가리 사진가 문카치의 작품 <탕가니카호수의 세 소년>과의 조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카메라로 그런 것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제기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로 나간 그때부터 진지하게 사진에 몰입하기 시작했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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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라이카

브레송은 “영원을 순간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이란 사실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50mm 렌즈가 달린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하고 세계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라이카는 그의 사진 인생과 함께 했다.

브레송이 ‘눈의 확장’이라고 일컫던 라이카는 작은 크기와 신속한 기동력이 장점이었다. 때문에 거리에서 피사체에게 들키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를 프레임에 담아낼 수 있었다. 사진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으며 그림을 떠나 사진을 시작하게 된 브레송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후 펼쳐진 브레송의 인생을 연대기처럼 따라가면 마치 멋진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후에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앙드레 프리드먼을 만나 “어이 친구! 초현실주의 사진가는 그만두고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기자가 되게. 머뭇거리면서 찍지 말고 자신있게 나가라고”라는 충고를 듣는다거나 좌파였던 그가 30년대 후반에 프랑스 공산당의 석간신문 사진기자로 근무한 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에 입대 참전했으나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세번째 탈옥 시도 끝에 겨우 자유의 몸이 된 일, 47년 봄 로버트 카파의 아이디어였던 매그넘 창설에 동참한 일 등은 이제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2003년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건물에 브레송재단이 들어섰다. 그 건물은 1913년 건축가상을 받았던 아름다운 아뜰리에로 “예술가들을 위한 집”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재단은 브레송과 그의 가족들이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것이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익성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 불릴 만한 브레송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세계 각국에서 오는 방문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주목적이며 브레송의 유지를 받들어 사진에 관한 강연과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개최하고 있다. 연간 약 5만명이 이곳을 끊임없이 찾는다.3~6월 영국에서 스크랩북 전시회

2007년 연말 재단을 방문하기 위해 파리 메트로 13호선을 타고 가다 괴테역에서 내렸다. 재단은 괴테역에서 멀지 않았고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도 가까운 편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층과 3층은 사진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브레송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사진가들의 전시회도 해마다 세차례씩 진행한다. 브레송은 생전에 많은 사진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재단은 브레송의 뜻을 이어 그와 같은 방식, 즉 진실과 인간을 존중하는 폭넓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을 선정해 한층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할애하고 있다. 2년에 한번 새로운 사진가를 발굴해 재단이 브레송상(상금 30,000유로, 2007년 수상자는 짐 골드버그)을 시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브레송은 그가 남긴 재단을 통해 여전히 다른 사진가들과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재단에서 홍보-전시를 맡고 있는 폴린 베르마레씨는 설명한다. 2007년 12월까지 미국 사진가 헬렌 레빗의 작품들이 걸렸고 올해 1월 17일부터 사울 라이터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4층에선 브레송과 관련된 비디오와 디브이디가 상영되며 5층은 재단의 자료실 겸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브레송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재단에 따르면 전세계에 흩어진 브레송의 빈티지 프린트를 아직 모으고 있고 동시에 분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탄생 100주년인 올해 안으로 정리가 일단락되면 훨씬 많은 사진들을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우선 3월부터 6월까지 영국에서 최초로 ‘스크랩북’ 전시회가 열린다.

‘스크랩북’은 그의 사진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브레송이 3년이나 포로로 잡힌 탓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그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작가유고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살아 돌아온 브레송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고 전시회에 기꺼이 도움을 주기로 한다. 1946년 평소에 자주 인화작업을 하지 않던 브레송은 직접 인화한 300장의 사진을 들고 뉴욕으로 갔고 스크랩북을 하나 산 뒤 직접 사진을 풀로 붙여 연대순으로 정리, 그 앨범을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에게 보냈다. 1932년부터 1946년까지 찍은 사진들로 당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 많았다. 유고전으로 준비를 시작했으나 생환기념전이 된 전시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이듬해인 1947년 2월 4일 막을 올렸는데 브레송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말년에 브레송은 이 스크랩북의 복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작업을 마치지 못했고 2004년 그가 세상을 뜬 후 재단쪽에서 복원작업을 마무리하고 세상에 다시 공개되었다. 이 밖에 9월부터 11월 사이엔 브레송재단에서 ‘브레송-워크 에반스 공동기획전’이 열리며 11월 열리는 유럽최고의 사진축제 ‘파리포토’ 기간엔 브레송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이 예정되어 있다. 브레송을 사랑하는 사진 애호가들에겐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행사가 될 것이다.

“사진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것”

브레송은 65년에 매그넘의 일선에서 물러났고 1973년에 공식적으로는 사진에서 손을 뗐다. 늘 그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는 재단 쪽 관계자에게 브레송의 변을 전해들었다. 그가 사진을 그만둔 이유에선 자존심이 넘쳐흐르고 까칠함과 동시에 솔직함도 풍겨난다. 브레송은 사진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카메라를 손에서 내리고 그가 최초로 열정을 기울였던 그림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그림을 위해서 개인적인 사진은 계속 찍었고 1990년대 후반까진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재단을 방문한 김에 대가의 가르침을 한 자락 전해 듣고 싶어 우문을 던졌다. “브레송처럼 잘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남긴 게 있을까?” 브레송이 말하길 “당신은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가 없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가슴에서, 눈에서 그리고 영혼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현답이 돌아왔다.

이미지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에서 브레송은 ‘시대의 눈’으로 불렸다. 파리에 있는 브레송재단뿐만이 아니라 그가 남긴 사진이 걸려 있는 전세계 곳곳에서, 시대의 눈은 꺼지지 않고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