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Installation & Sculpture

* Saint-Phalle, Niki de (니키 드생팔)

art holic 2007. 5. 14. 17:24
프랑스 파리 퐁피드 센터(현대미술관) 옆에 빨간 입술, 검은 모자, 레인보우 뱀, 해골 등의 조각분수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니키 드 생팔 과 쟝 팅겔리.
이 작가는 니키 드 생팔.
소문대로 보그지 모델 할 만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2006.11.17 - 2007.01.21
http://www.moca.go.kr/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
뚱뚱하면서도 밉지 않고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여성조각상으로 익숙해진 니키 드 생팔도 처음부터 예술가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탁월한 미모로 18세 되던 해부터 패션잡지 모델을 했던 그는 20대 초반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하는데 이때 내적 치유를 위해 그렸던 그림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1960년대 초반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도한 신사실주의 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흰 캔버스 위에 물감 총탄을 쏘아 흘러내리는 얼룩을 작품으로 선보인 ‘슈팅 페인팅’ 연작은 그녀의 이름을 널리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품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첫 남편과의 이혼 후 두 번째 남편이 된 조각가 장 팅겔리의 영향이 크다. 팅겔리는 조각적 요소와 건축적 구조에 큰 비중을 두는 니키 드 생팔의 작품세계를 현실화하는 등 제작 실무적인 부분에서도 조력자였다.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카파비오라는 작은 도시에 세워진 타로 공원. 1998년 정식 개관한 이 공원은 공사기간만 20년에 달하는 역작이다



생명력으로 터질 듯한 여성의 육체
《나나 NaNa》 시리즈에서는 밝게 채색된 그로테스크한 조각상이 등장한다. 낙천적이고 맵시 없이 과장되게 부푼 모습들은 밝고 재미있는 색채를 띠어 활기차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의 약점이나 두려움, 불확실성 등에 대한 역설적인 상상을 하게 만든다. 스톡홀름 미술관에 거대하게 세워진 《혼 Hon》(1966)은 여성의 육체를 본떠 만든 조각품으로, 어느 남성보다 크고 강한 조각품을 만들고자 하여 만든 것인데, 그 몸 속에 유원지를 연상케 하는 환경을 설계하여 영원한 정신적 안식처로서의 여성을 말하였다
다채로운 빛깔로 채색되고 몸의 부분 부분마다 등고선처럼 선을 긋거나 문양을 그린 여성조각상 ‘혼’은 임신부를 닮았다. 니키 드 생팔의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생명력 넘치는 여성의 원형 ‘나나(Nana)’의 모습은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허벅지와 팔뚝에 넘쳐나는 살, 유쾌하기 그지없는 색채로 온 몸을 뒤덮은 모습은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여성상 ‘나나’가 확대된 듯한 모습이다. 육중한 몸을 바닥에 누인 이 조각은 그 길이만 25미터에 달한다. 단순히 크기만 하다면 특별할 게 없겠지만, 여성의 자궁 부위로 직접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자궁 속에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우유를 마시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쩍 벌린 가랑이 사이로 적나라하게 노출된 질구를 문으로 설정했지만 이는 음란하기보다 출산하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여성 속에 내재된 힘을 모성이라는 형태로 보여주면서, 타인과 타인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교감하는 장으로 이끌어낸‘혼’은 질구를 통과하는 통과의례적 행위 속에 자궁회귀에 대한 욕구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뚱뚱하면서도 밉지 않고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여성조각상으로 익숙해진 니키 드 생팔도 처음부터 예술가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탁월한 미모로 18세 되던 해부터 패션잡지 모델을 했던 그는 20대 초반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하는데 이때 내적 치유를 위해 그렸던 그림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1960년대 초반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도한 신사실주의 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흰 캔버스 위에 물감 총탄을 쏘아 흘러내리는 얼룩을 작품으로 선보인 ‘슈팅 페인팅’ 연작은 그녀의 이름을 널리 유명하게 만들었다.




작가약력

1930년 10월 29일 6시 40분, 뇌이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카트린느 마리-아네스 팔 드 생팔(Catherine Marie-Agn?s Fal de Saint Phalle) 출생. 별자리는 전갈자리. 아르페(Harper) 출신 잔느 자클린(Jeanne Jacqueline)과 앙드레 마리 팔 드 생팔(Andr? Marie Fal de Saint Phalle)의 다섯 자녀 중 차녀. 6명의 형제와 함께 가족은행의 소유주였던 부친은 1929년 대공황 당시 모든 부와 사업을 잃음. 마리-아네스는 니에브르(Ni?vre)의 조부모님 댁으로 보내져 3년 동안 생활.
1933년 마리-아네스, 미국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감. 매년 여름이 되면 우아즈(Oise)에 있는 외조부 소유 필레르발(Fillerval) 성(城)에서 방학을 보냄.
1937년 가족과 함께 뉴욕 이스트 스트리트 88번지 아파트로 이사. 마리-아네스는 이때부터 니키(Niki)라고 불림. 니키는 이스트 스트리트 91번지에 위치한 미션스쿨 사크레-꿰르(Sacr?-Coeur) 학교에 입학.
1941년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뉴저지주 프린스턴의 외조부모님 댁으로 보내짐. 외조부모님은 당시 전쟁 중이던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 정착. 프린스턴에서는 집 근처의 공립학교를 다님.
1942년 다시 뉴욕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옴. 부모님은 니키 드 상팔을 브릴리 스쿨(Brealy School)에 등록시킴. 에드가 앨런 포,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에 심취함. 학교연극에 참여하여 첫 번째 희곡과 시를 집필. 라 페스트 La Peste.
1944년 학교에 있는 그리스 조각상의 포도 잎 모양 국부가리개 부분을 진한 붉은 색으로 칠함. 교장은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니키를 퇴학시키겠다고 함. 결국 니키의 부모님은 딸을 뉴욕 주에 있는 미션스쿨, 쉬프랭 학교(Suffren)의 기숙사로 보냄.
1947년 메릴랜드 주의 올드필드 스쿨(Oldfield School)에서 바칼로레아 취득.
1948-1949년 잠시 동안 모델로 일함. <보그>, <하퍼스 바자>에 사진이 실림. <라이프 매거진> 표지모델. 18세에 해리 매튜(Harry Mathews)와 사랑의 도피를 떠남. 1949년 6월 6일 뉴욕에서 결혼.
1950년 모친의 고집으로 니키는 해리 매튜와 1950년 2월 뉴욕의 프랑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림. 니키 부부는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정착. 남편 해리는 하버드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함. 이 기간 동안 니키는 처음으로 유화와 과슈화를 그림.
1951년 보스턴에서 4월 23일, 니키 드 생팔과 해리 매튜의 장녀 로라(Laura) 출생.
1952년 니키 부부는 딸 로라와 함께 매사추세츠주를 떠나 파리로 감. 남편 매튜는 지휘자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함. 니키는 극예술 수업에 등록. 부부는 둘 다 적극적으로 로라를 돌봄. 이 해 여름, 가족은 프랑스 남부, 스페인, 이태리를 여행하며 여러 미술관과 성당을 둘러봄. 니키는 ‘집단적 이상형’으로서의 성당이라는 사고에 깊은 인상을 받음. 이 때의 이미지는 장차 그녀의 창작활동에 영향을 미침.
1953년 심각한 신경쇠약으로 니스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 그림을 통해 신경쇠약을 극복. 미술가가 되기 위해 연극을 포기하기로 결심. 동시에 남편 해리는 음악공부를 그만두고 첫 번째 소설을 쓰기 시작함.
1954년 3월, 니키 부부는 파리로 돌아와 미국인 재즈뮤지션이자 작곡가인 안토니 보너(Anthony Bonner)와 같은 집에 살게 됨. 미국인 화가 휴 웨이스(Hugh Weiss)를 소개받음. 이후 5년 동안 웨이스는 니키의 조언자로서 그녀가 계속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줌. 9월 니키 부부는 파리를 떠나 마주르카 섬의 데이야(Dey?)로 감.
1955년 5월 1일 장남 필립 출생.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며 가우디(Gaudi)의 건축 작품을 접하게 됨. 그 중에서도 구엘 공원은 그녀의 삶 전체를 바꿔놓음. 결국 가우디의 영향으로 장차 그녀 자신의 조각공원을 만들게 됨.
1956-1958년 니키 가족은 알프스 산 근처 랑-성-베르코르(Lans-en-Vercors)에서 여러 달을 보냄. 니키는 일련의 유화를 완성한 후 1956년 4월, 생-갈(Saint-Gal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짐. 8월 가족과 함께 파리로 돌아와 알프레드-뒤랑-클레이(Alfred-Durand-Claye) 가(街)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 니키 부부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파리의 여러 미술관을 자주 관람. 니키는 파울 클레(Paul Klee),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두와니에 루소(Douanier Rousseau)의 작품들을 보게 됨. 또한 문학계에 투신한 남편 해리의 소개로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와 케네스 코흐(Kenneth Koch)를 비롯한 많은 당대 미국문인들과 교류. 1956년 쟝 팅겔리(Jean Tinguely)와 그의 부인 에바 애플리(Eva Aepply)를 알게 됨. 니키는 몇 달 후 첫 번째 조각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쟝 팅겔리에게 금속골조를 용접해 달라고 부탁. 니키는 이 골조에 석고를 입힘. 오트리브(Hauterives)에 있는 조셉 페르디낭 슈발(Joseph Ferninand Cheval)의 <이상적 궁전 Palais Id?al>을 관람.
1959년 파리현대미술관에서 미국인 미술가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작품들을 접하게 됨.
1960년 남편 해리와 결별. 해리는 새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생활. 니키는 여전히 알프레드-뒤랑-클레이에 머무르며 미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으면서 석고 아상블라주와 사격회화 기법 적용에 매진. 1960년 말부터 쟝 팅겔리와 앵파스 롱생(Impasse Ronsin)으로 이사. 쟝 팅겔리와 아틀리에 공유. 앵파스 롱생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예술가들을 만나게 됨. 쟝 팅겔리는 니키를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관장인 퐁투스 훌텐(Pontus Hulten)에게 소개시켜 줌. 훌텐과의 만남으로 니키는 당대의 여러 중요전시회에 참석하게 됨. 훌텐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니키의 몇몇 작품을 구입.
1961년 2월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비교: 그림-조각 Comparaison: Peinture-Sculpture》에서 아상블라주 <내 연인의 초상 Portrait of My Lover>을 전시함. 2월 12일, 앵파스 롱생에서 사격 시리즈 중 첫 번째 사격 작품 전시. 이 시리즈는 1961년부터 63년 사이에 제작된 약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음. 사격작품이란 석고 지지대 위에 고정시켜 놓은 여러 가지 잡다한 오브제 아상블라주에 총을 쏘아 석고로 싸여진 여러 가지 물감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터트리는 것임. 그렇게 부조에 물감을 끼얹는 것. 이 시리즈는 나중에 <사격 Tir>이라는 이름을 갖게 됨. 최초 사격에는 여러 명의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참석. 그들 중에서도 특히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는 니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누보레알리즘 그룹에 참여할 것을 권유. 당시 아르망(Arman), 세자르(C?sar), 크리스토(Christo), 제라르 데샹(G?rard Deschamps), 프랑소와 뒤프렌(Fran?ois Dufr?ne), 레이몽 엥스(Raymond Hains), 이브 클랭(Yves Klein), 마르시알 레이스(Martial Raysse), 밈모 로텔라(Mimmo Rotella), 다니엘 스포에리(Daniel Spoerri), 쟝 팅겔리(Jean Tinguely), 자크 빌글레(Jacques Villegl?)가 이 그룹의 일원이었음. 3월,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린 퐁투스 훌텐 기획의 《휘어짐?움직임 Bewogen Beweging》전시회에 참여. 이후 이 전시회는 스톡홀름 현대미술관과 덴마크 훔레벡(Humlebaek)의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서도 소개됨. 6월 20일, 니키 드 생팔, 쟝 팅겔리,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이센버그는 파리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 퍼포먼스, <변주 II Variations II>에 참여. 이 음악 퍼포먼스에서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가 존 케이지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동안 조형 예술가들이 무대 위에서 작품을 제작. 피에르 레스타니는 부인인 자닌 드 골드슈미츠(Jeannine de Goldschmidt)가 운영하는 갤러리 제이(J)에서 니키의 첫 번째 개인전 《마음대로 사격! Feu ? Volont?》을 개최함. 6월 30일부터 7월 12일까지 계속된 이 전시회에서는 관람객들이 그림에 직접 사격을 할 수 있었음.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와 모든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개막식에 참석. 라우센버그는 <사격> 연작 중 한 작품을 구입. 마르셀 뒤샹은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를 살바도르 달리에게 소개시켜줌. 니키와 장의 스페인 여행 당시 달리는 이 둘에게 피구에라스(Figueras)에서 열릴 예정인 투우 경기를 위해 <불의 황소 Toro de Fuego>를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함. 니키와 장은 행사를 위해 석고와 종이로 실물크기의 황소를 만들고 황소의 배를 불꽃놀이 탄으로 가득 채움. 전통에 따라 투우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불의 황소>의 배에서 불꽃놀이 탄이 폭발하면서 관중들에게 빛과 색의 떠들썩한 향연을 제공함. 10월, 니키는 뉴욕현대미술관이 주최한《아상블라주 아트 The Art of Assemblage》전시회에 참여. 이 전시회는 이후 댈러스 현대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다시 열림. 1961년 6월부터 9월까지, 50개가 넘는 국제잡지와 학술지에서 니키의 작품에 대한 논문과 기사를 실음. 같은 해 가을, 래리 리버스(Larry Rivers)와 부인 클라리스(Clarice)가 앵파스 롱생의 아틀리에로 이사옴. 래리 부부는 니키-쟝 부부와 커플과 빠르게 우정을 쌓음.
1962년 2월,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는 캘리포니아를 방문, 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있는 시몬 로디아(Simon Rodia)의 와츠타워(Watts Tower)를 둘러봄. 니키는 즉흥극 <세계의 종말을 위한 습작 No. 2 Study for the End of the World Number 2>에 대한 미국 CBS 방송국 다큐멘터리 촬영에 참여. 이 즉흥극은 네바다 사막에서 촬영됐으며 쟝 팅겔리가 감독한 작품임. 니키는 미국에서 두 번의 사격 시리즈를 연출. 첫 번째는 3월 4일 말리부 해변 버지니아 드완(Virginia Dwan)의 집 앞에서 열렸으며, 두 번째는 에드 킨홀츠(Ed Kienholz)의 도움으로 말리부 해안 언덕에서 열렸음. 쟝 팅겔리와 함께 멕시코 여행. 5월 4일,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케네스 코흐 극본,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연출의 <보스턴의 건설 Construction of Boston> 공연에 참여. 공연도중 니키는 <밀로의 비너스 V?nus de Milo>에 사격페인팅을 함. 유럽으로 돌아온 후 니키는 파리의 갤러리 리브 드루와트(Rive Droite)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10편의 <사격과 제단 Tirs et Autels>을 소개. 당시 개인전을 관람했던 알렉산드르 이올라(Alexandre Iolas)는 니키에게 10월에 자신의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것을 제안. 이렇게 니키와 알렉산드르간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됨. 알렉산드르는 수년에 걸쳐 니키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그녀를 위해 수많은 전시회를 기획함. 니키가 초현실주의 화가들인 빅토르 브라우너(Victor Brauner),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와 교분을 갖게 된 것도 알렉산드르 덕분임. 6월 6일 이브 클랭 사망. 8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니키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마르시알 레이스, 다니엘 스포에리, 쟝 팅겔리, 펄 올로프 울트베트(Per Olof Ultvedt)와 함께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의 거대 설치물 <움직이는 미궁 Dylaby> 제작에 참여. 10월 15일부터 11월 3일까지, 알렉산드르 이올라는 니키의 첫 번째 뉴욕 개인전을 기획함. 이 전시회에서 니키는 아상블라주, <우체부에 대한 경배 Hommage au Facteur>와 10점의 다른 작품을 발표. <우체부에 대한 경배>는 관람객이 사격 페인팅을 할 수 있게 고안됨.
1963년 5월, 버지니아 드완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사격 퍼포먼스를 기획. 이 퍼포먼스에서 니키는 거대한 크기의 <킹콩 King Kong>에 사격. 완성된 작품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구입함. <킹콩>은 니키 드 생팔의 예술세계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초기 괴물들 중 하나임. 이후 그녀의 작품세계에 다른 괴물들이 계속 등장함.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는 에손(Essonne) 수와지-쉬르-에꼴(Soisy-sur-Ecole)의 오래된 여인숙, ‘백마의 여인숙(Auberge du Cheval Blanc)’을 인수. 니키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에 대한 숙고를 계속하면서 출산하는 여인, 탐욕스러운 어머니, 마녀와 창녀들의 조각 시리즈를 제작.


1964년 니키는 로잔(Lausanne) 근처 뤼트리(Lutry)에서 여름을 보냄. 여기서 니키는 딱딱한 종이와 모직으로 만든 커다란 머리 작업을 계속함. 또한 <신부 Mari?es> 연작 몇 작품과 <성 게오르그와 용 Saint George and the Dragon> 제작을 계속함. 9월 니키의 첫 번째 런던 전시회가 하노버 갤러리에서 열림. 10월 뉴욕 방문. 아틀리에로 변한 첼시 호텔방에서 니키는 <나나 Nanas>, <심장 Hearts>, <용 Dragons> 등 조각-콜라주 연작을 제작함.


1965년 4월, 클라리스 리버스의 임신에서 영감을 얻어 첫 번째 <나나>를 천과 모직으로 제작. 8월, 스위스 예술잡지 에 12 페이지에 걸쳐 니키에 대한 기사가 실림. 기사 작성자는 모니크 자코(Monique Jacot). 9월, 파리의 갤러리 알렉스산드르 이올라에서 열린 니키의 개인전에서 <나나>가 소개됨. 알렉산드르 이올라 갤러리는 전시회 개최와 동시에 니키의 첫 번째 아티스트 북을 출판. 아티스트 북에는 니키가 직접 쓴 텍스트와 <나나>의 그림들이 추가됨. 니키는 알렉산드르의 격려로 전시회 홍보를 위해 초대장, 포스터, 책, 다양한 글 등 인쇄물 제작에 매진. 모든 인쇄물에는 니키의 사인이 들어감. 첫 번째 실크스크린을 시작함.
1966년 마르시알 레이스, 쟝 팅겔리와 함께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된 롤랑 쁘띠(Roland Petit)의 발레 <광기의 찬가 Eloge de la Folie>의 의상, 무대장치에 참여. 6월, 퐁투스 훌텐은 니키 드 생팔, 쟝 팅겔리, 펄 올로프 울트베트에게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입구에 세울 커다란 조각을 제작해 줄 것을 요청. 이들 세 명은 공동으로 길이 28미터, 폭 9미터, 높이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잠자는 나나, <그녀 Hon>를 제작. ‘Hon’은 스웨덴어로 ‘그녀’라는 뜻. 스톡홀름에서 니키와 장은 젊은 스위스 예술가 리코 베버(Rico Weber)를 알게 됨. 리코 베버는 <그녀>의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수년 동안 니키와 쟝의 동료이자 어시스턴트로 활동. 10월, 레이너 폰 디에즈(Rainer von Diez) 연출로 독일 카셀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리시스트라타 Lysitrata>의 의상과 무대장치 디자인.
1967년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는 몬트리올 엑스포의 프랑스 관에 설치할 목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주문한 작품인 <환상의 파라다이스 Le Paradis Fantastique>를 제작함. 완성된 작품은 니키가 만든 9개의 채색조각과 쟝 팅겔리가 만든 6개의 검은색 움직이는 기계로 구성되어 있음. 몬트리올 엑스포가 끝난 뒤에 이 작품은 뉴욕 주 북부 버팔로의 올브라이트-녹스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되었고 이후 1년 동안 뉴욕 시 센트럴 파크에 전시되었음. 오늘날 이 작품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음. 8월, 니키의 첫 번째 회고전 《나나 파워 Nanas au pouvoir》가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림. 이 회고전에서 첫 번째 <나나-집 Nana-Maison>, 첫 번째 <나나-분수 Nana-Fontaine>, <나나-도시 Nana-Ville>가 전시됨. 이 새로운 작품들은 폴리에스테르수지로 제작됨. 당시 니키는 막 폴리에스테르수지를 작품제작에 사용하기 시작함.
1968년 6월, 카셀 국립극장에서 니키 드 생팔의 첫 번째 연극, 가 공연됨. 이 작품은 레이너 폰디에즈와 공동극본, 공동 연출한 작품. 니키는 의 무대장치, 의상, 포스터를 제작. 뒤셀도르프의 라인란데 베스트팔렌 쿤스트페어라인(Kunstverein f?r die Rheinlande Westfalen)에서 전시회《니키 드 생팔: 작품 1963-1968 Niki de Saint Phalle: Werke 1962-1968》이 열림. 이후 이 전시회는 하노버 쿤스트페어라인에서 재 소개됨. 10월, 파리의 알렉산드르 이올라 갤러리에서 부조 <지난밤, 나는 꿈을 꿨어요 Last Night I Had a Dream>가 전시됨. 이 부조는 18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작품. 니키는 풍선 형식의 나나를 스케치함. 그녀가 그린 나나는 뉴욕에서 제작, 보급됨. 68년 말 폐질환으로 고통을 겪음. 니키의 거의 모든 조각 작품에 사용되는 폴리에스테르의 먼지와 가스 흡입이 원인이 됨. 모로코 여행.
1969년 인도여행에서 돌아온 후 첫 번째 건축 작품 작업에 돌입. 프랑스 남부에 레이너 폰 디에즈의 주문으로 세 채의 집을 지음. 1971년 완성됨. <새의 꿈 Le R?ve de l'Oiseau>이라는 낭만적 이름의 작품. 스탱글 시립 갤러리는 니키의 작품세계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전시회《니키 드 생팔의 조각, 드로잉, 판화 Plastiken, Zeichnungen und Graphiken von Niki de Saint Phalle》를 개최. 뉴욕 휘트니미술관은 니키의 <검은 비너스 Black Venus>를 인수, 그해 4월 《현대미국조각, 선별 2부 Contemporary Americain Sculpture, Selection 2》전시회에서 소개. 이 기간 동안 밀리-라-포레(Milly-la-For?t)에서는 쟝 팅겔리가 기획하고 니키와 다른 여러 예술가들이 참여한 <키클롭 Cyclop>의 제작이 시작됨. 이 작품은 ‘머리 La T?te’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함.
1970년 11월 29일 밀라노에서 열린 피에르 레스타니와 귀도 르 노치(Guido Le Noci)가 주최한 누보 레알리즘 그룹 창립 10주년 기념 페스티발 개회식에서 니키는 아상블라주에 사격페인팅을 함. 17개의 실크스크린 연작이 파리에서 <나나 파워 Nana Power>라는 이름으로 출판됨. 니키는 쟝 팅겔리와 함께 이집트 여행을 떠남.
1971년 7월 13일,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는 수와지(Soisy)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모로코로 신혼여행을 떠남. 8월 10일 발리(Bali)에서 니키의 첫 번째 손녀이자 로라와 로랑 콩도미나(Laurent Condominas)의 딸인 블룸(Bloum)이 태어남. 니키는 그녀의 첫 번째 보석을 디자인. 1971년 말, <골렘 Golem> 제작 시작. <골렘>은 예루살렘 라비노비치 공원의 어린이들을 위한 구조물임. 1972년 완성.
1972년 니키는 대형 조각 제작과 그 밖의 다양한 작품 출판을 위해 로버트 할리건(Robert Haligon)에게 도움을 요청. 이를 계기로 할리건과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됨. 이 관계는 그의 아들인 제라르(G?rard)까지 이어짐. 7월, 프랑스 남부 그라스(Grasse)근처의 샤토-드-몽(Ch?teau-de-Mons)을 임대한 후, 영화 <대디 Daddy>의 촬영을 시작함. 피터 화이트헤드(Peter Whitehead)와 공동극본, 연출, 제작한 <대디>는 그해 11월 런던의 해머 시네마에서 소개됨. 제네바의 갤러리 보니에에서 전시회《니키 드 생팔: <나나>연작 이전의 니키》가 열림.
1973년 1월, <대디>의 두 번째 버전 연출. 수와지와 뉴욕에서 찍은 새로운 촬영분이 추가됨. 클라리스 리버, 레이너 폰 디에즈, 미아 마틴(Mia Martin)이 영화제작에 참여. 1973년 4월 제 11회 뉴욕 시네마 페스티벌 중 링컨 센터에서 <대디>의 시사회가 열림. 니키는 페스티벌 프로그램 표지를 디자인함. 조르주 플루비에(Georges Plouvier) 소유 생-트로페(Saint-Tropez) 별장의 수영장 디자인. 벨기에의 노크-르-주트(Knokke-le-Zoute)에서 파비엔느(Fabienne)와 로저 넬른(Roger Nellens) 부부의 자녀들을 위한 놀이집 <용 Le Dragon>을 제작.
1974년 니키 드 생팔은 독일 하노버에 세 개의 대형 나나를 설치. 하노버 시는 이 세 나나를 세 명의 독일 여왕의 이름을 따 캐롤린, 샤를로트, 소피라고 부르기로 함. 파리의 갤러리 알렉산드르 이올라에서 니키의 건축프로젝트 모형이 전시됨. 독일 바덴바덴의 갤러리 닥터 어니스트 하우스베델은 《니키 드 생팔: 조각, 드로잉, 판화, 풍선 - 나나 Niki de Saint Phalle: Skulpturen, Zeichnungen, Graphik, Ballon-Nanas》라는 전시회를 열고 그녀의 작품세계의 다양한 면을 소개. 수년 동안 폴리에스테르로 작업한 결과 폐에 농양이 생겨 입원. 퇴원 후 애리조나에서 오랫동안 요양. 이후 스위스 산악지대 생-모리츠(Saint-Moritz)에 거주. 니키는 이곳에서 50년대 뉴욕에서 만났던 옛 친구, 마렐라 아넬리(Marella Agnelli)와 재회. 당시 니키는 마렐라에게 조각공원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얘기한 바 있음. 마렐라의 오빠들인 카를로(Carlo)와 니콜라 카라시올로(Nicola Caracciolo)는 니키에게 토스카나의 토지를 제공함으로써 니키의 꿈이 실현되게 도와줌.
1975년 영화 <밤보다 긴 꿈 Un r?ve plus long que la nuit>의 시나리오 집필. 니키의 많은 예술가 친구들이 영화 촬영에 참여. 영화 배경에 나오는 가구는 니키가 디자인한 작품. 1975년 유로팔리아-프랑스 페스티벌에서 브뤼셀 보자르 궁전은 건물 정면에 영화의 배경에 등장한 여러 소품들을 걸어놓음.
1976년 니키는 1976년 전체를 스위스 산악지대에서 보냄. 이곳에서 조각공원 구상에 매진. 로테르담의 보이만 반 뵈니겐(Boymans van Beunigen) 미술관은 《니키 드 생팔의 건축 모형 Beelden, modellen en maquettes van Niki de Saint Phalle》전시회를 열고 니키의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소개. 덴마크 알보그의 노르딜랜드 미술관(Nordjyllands Kunstmuseum)은 전시회《조각가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Sculpturer》개최. 제네바의 갤러리 보니에는 전시회 《니키 드 생팔: 최근 작품들 Niki de Saint Phalle: Œuvres r?centes》개최.
1977년 콘스탄틴 멀그레이브(Constantin Mulgrave)와 함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를 각색한 영화 <여행 동반자 The Traveling Companion>의 배경을 디자인. 멕시코 여행. 미국의 뉴멕시코 주 여행. 리카르도 메농(Ricardo Menon)이 어시스턴트가 됨. 이후 10년 동안 함께 작업.
1978년 카를로와 니콜라 카라시올로가 제공한 토스카나 지방의 가라비치오(Garavicchio)에서 <타로정원 Jardin des Tarots> 시공. 니키는 타로 카드의 그림과 상징에서 영감을 얻어 22개의 대형 조각을 제작함.
1979년 대부분의 시간을 토스카나에서 <타로 정원>의 기초를 만들면서 보냄. 3월 도쿄 와타리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첫 일본 전시회에 참석. 뉴욕의 짐펠 & 웨이젠호퍼 갤러리는 전시회《니키 드 생팔: 기념비적 프로젝트, 모형 그리고 사진 Niki de Saint Phalle: Monumental Projects, Maquettes and Photographs》개최. 이후 동일 전시회가 미국의 다른 4개 미술관에서 열림. <스키니 Skinnies> 연작의 첫 번째 조각 완성.
1980년 4월, <타로 정원>의 마법사, 황후 작업 시작. 니키의 조각 작품 <시인과 그의 뮤즈 Le po?te et sa muse>가 울름대학 캠퍼스에 세워짐. 5월에서 7월까지 니키의 그래픽 작품이 울름대학 갤러리에서 전시됨. 7월에서 9월까지 퐁피두센터에서 대대적인 규모의 니키 드 생팔 회고전이 열림. 회고전 개막 다음날 관절염 발병. 파리에서 열린 이 회고전은 이후 유럽 전역에 소개됨. 그 중에서도 독일 뒤스부르크의 빌헬름-렘부르크 미술관과 하노버 쿤스트 미술관에서 동일한 회고전이 소개됨. 요코 마수다는 도쿄에서 니키 광장을 완성한 후 니키 드 생팔 전시회 개최. 니키는 폴리에스테르를 사용해 자신의 첫 번째 의자, 꽃병, 램프를 제작.
1981년 <타로 정원> 근처에 작은 집을 임대. 현지의 젊은이들을 고용. 세피 임호프(Seppi Imhoff), 리코 웨버(Rico Weber)로 구성된 올스타 스위스 팀과 쟝 팅겔리가 <타로정원> 조각의 용접을 담당. 1981년 봄, 니키는 새로운 쌍발엔진, Piper a?rostar 602P가 장착된 비행기의 동체를 페인팅함. 이 비행기는 그해 6월, 피터 스투이베산트 재단(Peter Stuyvesant Foundation)이 후원한 《제 1회 대서양횡단 항공경주》에 출전.
1982년 미국회사 재클린 코크란(Jacqueline Cochran)은 니키에게 그녀의 이름을 딴 향수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 향수 런칭 수입은 <타로 정원>건설에 쓰임. 쟝 팅겔리와 함께 퐁피두센터 옆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광장에 세울 조각분수대 제작 작업. 이 분수대는 15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짐. 피에르-마리 르줜느(Pierre-Marie Lejeune)의 도움을 받음. 피에르-마리는 만년까지 니키의 가장 절친한 동료 중 한명이 됨. 뉴욕의 갤러리 짐펠 & 웨이츤 호퍼와 런던의 갤러리 짐펠 피스가 차례로 <스키니> 연작을 소개. <타로 정원>에서는 계속 작업이 진행됨. 네덜란드 예술가 독 윈센(Doc Winsen)이 쟝 팅겔리 대신 공원 내 조각의 금속 골조 제작을 담당. 1982년 말, 시멘트를 입히기 시작.
1983년 스튜어트 컬렉션이 UCSD(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고 캠퍼스)에 설치할 조각을 주문. <태양신 Sun God> 완성. <타로 정원>에서 니키는 ‘황후’라고 명명한 스핑크스 형태의 건물 내부에 살기 시작. 이후 7년 동안 이 건물은 그녀의 집인 동시에 아틀리에였음. 조각의 표면재료로 거울과 유리 외에 도자를 사용하기로 결심. 이를 제작하기 위해 리카르도 메농의 소개로 로마의 도자 교수인 베네라 피로치아로(Venera Finocchiaro)에게 도움을 요청. 이후 피로치아로 교수는 <타로정원>의 모든 도자 작업을 담당.
1984년 니키는 모든 시간을 <타로 정원>에 쏟아 부음.
1985년 <마법사 Le Magicien>, <탑 La Tour>, <여황제 L'imp?ratrice>, <여교황 La Papesse>을 비롯한 다수의 조각이 완성됨. 쟝 팅겔리는 <바벨탑 La Tour de Babel>을 마무리 짓는 기계를 완성. 벨기에의 노크-르-주트 카지노에서 니키 드 생팔 전시회가 열림.
1986년 니키는 <타로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냄. 정원에 다른 조각들이 세워짐. 실비오 바란둔(Silvio Barandun) 교수와 공동으로, ?손을 잡는다고 에이즈에 걸리지 않습니다 AIDS: You can't catch it holding hands?를 집필하고 책에 들어갈 삽화도 그림. 이 책은 화가 샘 프란시스(Sam Francis)가 설립한 Lapis Press에서 영어로 출판된 이후 5개 국어로 번역 출판됨. 총 7만부가 출판되어 각 의료센터와 학교에 판매되거나 비치됨. 리카르도 메농이 연극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타로 정원>을 떠나 파리로 돌아옴. 메농은 파리에서 알게 된 마르셀로 지텔리(Marcelo Zitelli)를 니키에게 소개함. 당시 니키는 정원사를 찾고 있는 중이었음. 지텔리는 처음에는 정원사였으나 곧 아틀리에로 들어가 나중에는 니키의 조수가 됨.
1987년 3월, 뮌헨미술관에서《니키 드 생팔: 그림-인물-환상적인 정원 Niki de Saint Phalle: Bilder-Figuren-Phantastische G?rten》이라는 대규모 전시회가 열림. 제네바의 갤러리 보니에에서 전시회 《니키 드 생팔: 최근 작품》전 열림. 롱아일랜드 로슬린의 나소 카운티 미술관에서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니키 드 생팔의 회고전 《판타스틱 비전: 니키 드 생팔의 작품 Fantastic Visions: Works by Niki de Saint Phalle》이 열림.
1988년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니키 드 생팔과 쟝 팅겔리에게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오랫동안 시장으로 재직했던 샤토-시뇽(Ch?teau-Chinon)시의 시청 앞 광장에 세울 분수대 제작을 주문. 3월 10일 분수대 개막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 헬렌 슈나이더(Helen Schneider)가 니키에게 롱아일랜드의 슈나이더 아동병원을 위한 새로운 분수대 제작을 주문. 니키는 5.5 미터 높이의 <뱀이 있는 나무 Arbre aux serpents>를 제작. 니키는 일본의 괴테연구소가 주최한 세계 연(鳶) 전시회를 위해 <사랑의 새 L'Oiseau amoureux>라는 거대한 연을 제작.
1989년 갤러리 JGM과 갤러리 드 프랑스가 공동으로 주최한 《80년대의 작품》전시회에서 니키는 쟝 팅겔리와 공동 제작한 작품을 소개. 페캉(F?camp)의 팔레 베네딕틴(Palais B?n?dictine)은 <타로 정원>에 대한 전시회를 개최. 이 전시회에서 퐁투스 훌텐, 피에르 레스타니, 쟝 팅겔리의 텍스트가 소개됨. 니키는 일련의 이집트 신 조각 작품을 제작. 그녀의 첫 번째 청동조각 작품. 리카르도 메농, 에이즈로 사망.
1990년 6월, 갤러리 드 프랑스와 갤러리 JGM에서 열린 전시회《사격과 또 다른 반항 1961-1964 Tirs...et autres r?voltes 1961-1964》에서 니키의 60년대 작품이 소개됨. 아들인 필립 매튜와 함께 자신의 저서 ?손을 잡는다고 에이즈에 걸리지는 않습니다?를 각색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감독. 11월 파리의 장식예술미술관에서 니키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상영됨. 동시에 장식예술미술관은 영화와 저서의 재판 본을 위해 니키가 그린 소묘작업을 전시. 프랑스 에이즈퇴치 운동본부는 ?너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을 거야 Sida: tu ne l'attrapera pas?를 출판, 프랑스의 모든 학교에 보급.
1991년 니키 드 생팔이 “모든 종교를 위한 교회”라고 묘사한 <이상적 사원 Temple id?ale>의 4:1 축소모형 제작. <이상적 사원>의 최초구상은 1972년. 6월, 런던의 갤러리 짐펠 피스는 전시회《신 Gods》에서 고대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신에서 영감을 얻은 일련의 조각상을 소개. 8월, 쟝 팅겔리 사망. 니키는 자신의 첫 번째 조각그림, <메타-팅겔리 M?ta-Tinguely>를 완성. 파울 자허(Paul Sacher)는 발(B?le)에 쟝 팅겔리 미술관 건립을 제안.
1992-1993년 본의 미술과 전시관(Kunst und Ausstellungshalle)의 후원으로 퐁투스 훌텐은 대규모 니키 드 생팔 회고전을 기획. 이 회고전은 이후 글래스고의 맥렐란 갤러리, 파리현대미술관, 프리부르(Fribourg)의 역사예술박물관에서 매번 수정된 형태로 열림. 니키는 일련의 움직이는 부조 혹은 움직이는 그림들 제작. <조각 그림>연작. 독일의 뒤스부르크 시는 니키가 제작한 분수 <구조원 Lebensretter>을 설치. 스위스의 로잔 올림픽 박물관 주문으로 조각 작품 <축구선수들 Les Footballeurs> 제작.
1994년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정착. 이후 2002년 5월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함. 샌디에고에 도착하자마자 <캘리포니아 일기 Califonia Diary>라는 석판 연작을 제작. 에비 콘펠드(Ebi Kornfeld)에서 출판. 니키는 두 명의 샘 프란시스의 전 동료, 석판화가인 조르주 파주(George Page), 동판화의 대가 사무엘 야콥(Samuel Jacob)과 함께 작업을 시작. 조르주 파주와는 26점의 석판화를, 사무엘 야콥과는 13점의 석판화를 제작했음. 전부 에비 콘펠드에서 출판. 니키의 요청으로 리히 주레코(Lech Juretko)가 거울, 유리, 돌, 그 밖의 조각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촉각적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재료 절단작업 전용 아틀리에를 구성. 리히 주레코는 이 세밀한 작업을 위해 6명의 기술자로 구성된 팀을 조직. 리히 주레코 팀은 이후 니키 드 생팔의 모든 대규모 프로젝트의 실현을 돕게 됨. 10월 일본의 나수(Nasu)에서 니키 미술관 개관식이 열림. 니키 미술관은 니키 드 생팔의 삶과 작품을 위한 미술관. 관장은 요코 마수다.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와 함께 예루살렘 재단이 주문한 대규모 조각/건축 프로젝트, <노아의 방주 L'Arche de No?> 제작에 돌입. 스위스 우체국을 위해 ‘Stop AIDS’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우표 디자인. 카렌 다쉬(Caran d'Ache)상 수상.
1995년 피터 샤모니(Perter Schamoni)는 니키 드 생팔의 삶에 대한 장편영화, <누가 괴물인가? 당신? 아니면 나? Who is the Monster? You or Me?>를 제작. AFAA(프랑스예술협회) 문화국은 멕시코의 루피노 미술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현대미술관, 콜롬비아 보고타 현대미술관, 브라질 상파울루 에스타도 피나코테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미술관을 비롯한 중앙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소개될 순회전시회를 기획.
1996년 샌디에고에 용 모양의 어린이집인 높이 3.63미터, 폭 9.09미터의 <질라 Gila>의 건축을 시작. 민간소유 주택인 <질라>는 거울, 자갈, 세라믹, 유리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뒤덮여 있음. <질라>는 컴퓨터를 이용한 확대기법을 적용해 완성됨. 이 기법의 사용은 게리 커어크(Gary Kirk)에게 위탁됨. 또한 컴퓨터 확대기법은 니키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에 발견하고 적용한 수많은 첨단기법중 하나임. 발(B??le)에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쟝 팅겔리 미술관 개관. 니키가 이 미술관에 기부한 그녀의 주요 조각 작품 55 점과 쟝 팅겔리의 그래픽 작품 100여점은 쟝 팅겔리 미술관 컬렉션의 근저를 이룸.
1997년 스위스 철도청의 주문으로 취리히 역 홀에 세울 높이 10미터짜리 조각상 <수호천사 L'Ange Protecteur> 제작. 11월에 완성. 마리오 보타는 <타로 정원>의 입구 벽과 창살을 제작. 니키는 델 커버(Dell Cover)와 데이브 카(Dave Carr)가 완성한 모자이크 상감기법으로 나무로 만든 뱀 의자를 디자인.
1998년 5월 15일 <타로 정원> 공식 개원. 예루살렘의 놀이공원 내 <노아의 방주>에 설치될 마지막 대형 조각들 완성. 니키는 이 조각들과 80년대 초부터 구상했던 모든 조각의 제작을 위해 마르셀로 지텔리의 도움을 받음.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루이 암스트롱(Louis Amstrong),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를 비롯한 미국 흑인사회의 스포츠, 재즈분야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오마주인 <블랙 히어로 Black Heroes> 연작을 제작. 이 연작은 혼혈인 그녀의 증손자, 손녀들을 위한 작품이었음. 샌디에고 민게이 국제미술관에서 니키의 친구인 마사 롱넥커(Martha Longnecker)가 기획한 니키 드 생팔 회고전이 열림.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열린 회고전 중 가장 큰 규모의 회고전. 자서전 ?흔적 Traces?의 1권 집필.
1999-2000년 독일의 울름미술관에서 니키 드 생팔의 회고전《니키 드 생팔-자유, 저항, 환상 Niki de Saint Phalle-Liebe, Protest, Fantasie》이 열림. 이 전시회는 이어 루트비히샤펜 암라인(Ludwigshafen-am-Rhein)의 빌헬름-핵 미술관에서 순회 전시됨. 스위스 프리부르의 쟝 팅겔리 & 니키 드 생팔 지역에서 니키 드 생팔의 전시회가 열림. 니키는 샌디에고와 로스앤젤레스의 갤러리 타센드에서 전시회를 열기 시작. <해골 Skull> 제작. 이 조각은 외부는 모자이크로 덮여있으며, 내부에는 거울 벽이 부착된 명상실이 있는 높이 5미터짜리 해골로 샌디에고 시 소유. 남부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Escondido)의 공원에 설치될 지름 125미터의 기념비 제작. 이 기념비는 뱀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있음. 이 공원은 캘리포니아의 전설적 여왕인 칼리파 여왕을 기리기 위한 공원임. 하노버 시는 헤렌하우젠 왕궁정원 동굴 내 세 개의 홀 정비를 니키에게 맡김. 니키는 피에르-마리 르줜느와 게리 커크와 함께 작업. 새로운 꽃병 시리즈 제작. 2000년 10월 도쿄에서 프리미엄 임페리얼(Imperial Praemium)상 수상. 프리미엄 임페리얼상은 일종의 노벨예술상에 해당. 당시 니키 드 생팔 외에 뮤지컬 작곡가 스테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 미국 미술가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 독일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프리미엄 임페리얼상 수상. 11월 17일, 니키 드 생팔은 하노버 슈프렝겔 미술관에서 작품 기증서에 서명. 하노버 시 시장이자 미술관 관장인 울리히 크렘펠(Ulrich Krempel)이 서류에 서명. 11월 19일 전시회 《축제-니키 드 생팔 기증 작품 La F?te-die Schenkung Niki de Saint Phalle》이 대중에게 개방됨.
2001년 9월 25일 발의 쟝 팅겔리 미술관에서 니키 드 생팔 회고전이 열림. 이 회고전에서는 슈프렝겔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들 대부분이 소개되고 개인소장품과 니키 드 생팔이 대여한 작품이 추가로 소개됨. 10월 11일 니스의 근현대미술관 영구전시실에서 니키 드 생팔이 니스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의 기증서 서명식이 열림. 기증된 작품은 총 190점으로 그림과 조각 93점, 판화 18점, 석판화 40점, 실크스크린 54점 및 그 밖의 수많은 독창적인 자료로 구성됨. 니스 시장 자크 페이라(Jacques Peyrat)와 미술관장 질베르 페를렝(Gilbert Perlein)이 니스시의 많은 의원들 및 공직자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증서에 서명함. 당시 니키 드 생팔은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대리인인 마리-프랑스 페스텔-드보르(Marie-France Pestel-Debord) 변호사가 참석. 니스 시장과 당시 샌디에고에 머물러 있던 니키 드 생팔 간의 전화통화가 연결됐을 때 기증서 서명식이 절정에 달함.
2002년 3월 16일, 니스 근현대미술관에서 니키 드 생팔의 회고전 개막. 5월 22일, 니키 드 생팔,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병원에서 호흡곤란으로 사망. 그녀는 니스 근현대미술관 회고전 준비과정에 대한 보고를 규칙적으로 받았으나 니스까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 회고전이 끝난 후 니스 근현대미술관의 상설전시실 중에 니키 드 생팔 / 쟝 팅겔리 갤러리에 그녀가 기증한 작품의 상당수가 쟝 팅겔리의 여러 작품들과 마주보며 놓이게 됨. 이렇게 함으로써 니스 근현대미술관은 쟝 팅겔리와의 깊은 애정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고자 했던 니키의 소망에 부응함. 니키의 작품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은 니키 드 생팔 자선 예술재단(Niki Charitable Art Foundation)과의 협력 하에 진행되고 있음.

자연 속에 펼친 꿈의 공간 ‘타로공원’
그녀의 작품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첫 남편과의 이혼 후 두 번째 남편이 된 조각가 장 팅겔리의 영향이 크다. 팅겔리는 조각적 요소와 건축적 구조에 큰 비중을 두는 니키 드 생팔의 작품세계를 현실화하는 등 제작실무적인 부분에서도 조력자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카파비오라는 작은 도시에 세워진 타로 공원이다. 이곳은 1998년 정식개관했는데, 공사기간만 20년에 달하는 역작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모자이크조각상이 인상깊은 안토니오 가우디의 귀엘 공원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공간 구성으로, 타로카드에 등장하는 메이저카드의 22개 캐릭터를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해 제작한 공공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일련의 ‘나나’ 연작과는 또 다른 느낌의 생물유기체적인 형상 속에 그의 환상세계를 마음껏 펼친 타로공원은 꿈의 공간인 동시에 방문자에게는 지극히 매혹적인 선물이다.
‘공공조각’은 1966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 설치된 <그녀 Hon>를 비롯하여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의 프랑스관을 위해 제작한 <환상적인 천국>, 1971년-72년 예루살렘 라비노비치 공원의 놀이조각 <골렘>, 1982년 퐁피두센터의 <스트라빈스키 분수>, 무엇보다 1978년에 착수하여 일반에 공개될 때까지 거의 20여년의 세월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역작 <타롯 공원> 등 작가의 공공 프로젝트와 관련된 드로잉, 판화, 모델 등과 후기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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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된  작품이 오진 않았다. 그의 자전적이야기를 담아서인지 영상자료에 에로틱한 면이 잠깐 드러난다. 옆에 온 아줌마 하나 난리다. 아이들이 가자는데 '아빠 어디있니, 이거 너무 웃기다' '어머어머'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소리내어 웃느라 옆에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지도 모르고 어떤 부분에 열을 올리는지 제일 열심히 본다.
갤러리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오는 것만도 반갑고 고맙고 그랬다.
이젠 제법 사람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인지 어쩐지 많이들 전시를 보러다닌다.
그들도 이젠 적어도, 도록이나 보도자료 종이와 전시장에 붙여있는 글 정도는  읽어보고 다닐 수 없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꽤 예쁘게 생겼던 그 아줌마!
니키 드 생팔은 영어 가정교사와 바람난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불우한 시절의  심각한 상황을 겪고, 페미니즘적인 사상의 영상을 담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