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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Installation & Sculpture

다츠오 미야지마

by @artnstory 2007.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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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7 - 8.25 아트선재미술관
2002.9.7 - 2002.11.10 아트선재센터

협력기관 : 일한 문화 교류기금, 일본 국제 교류기금, 시세이도
협 찬 : 삼보 컴퓨터, 크리스챤 또뚜 코리아

미디어 설치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온 다츠오 미야지마의 개인전. 다츠오 미야지마의 이번 전시는 일본작가로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갖는 개인전으로, 한국 관객과의 첫 만남인 만큼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선보인다. 전자 시계나 전광판에 쓰이는 LED(light emitting diodes-발광 계기판)를 재료로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작품에 담아온 미야지마는 이번 전시에서 '카운트 오브 라이프(Count Of Life)'라는 테마로, 5점의 대형 설치 작업들을 선보인다. 수많은 전광 계기판의 숫자들이 빛을 뿜어내는 웅장한 공간을 연출하는 <메가 데스(Mega Death)>와 이불, 조덕현, 최정화, 육근병 등 8명의 한국 작가들이 참여한 퍼포먼스 <카운터 보이스 인 더 워터(Counter Voice in the Water)> 한국에서 처음 소개되는 <죽음의 시계(Death Clock)>, <떠도는 시간(Floating Time)> 등을 통해 '볼 수 없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전환하는 철학적이면서도 조형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LED로 만들어진 섬광의 숫자들은 계속해서 변하면서 어두운 공간에서 보여지는데, 이 숫자들은 그가 끊임없이 탐구해온 주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한편, 이 숫자들이 계속해서 변하는 수치는 1에서 9까지이며 0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0의 의미이다. 그에게 0은 '아무 것도 없다'는 혹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무(無)의 개념이 라기 보다는 공 (空)의 개념이다. 사실상, 시간은 실재하지만, 실재하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미야지마는 그의 작품을 통해 '볼 수 없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전환하는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야지마의 실험은 '계속 변화한다'는 것, '모든 것과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된다'는 철학에 닿아있다.

시간의 장소 | 댄 카메론 (뉴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
다츠오 미야지마는 격동의 1980년대 후반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 무렵은 현대미술이 표현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한층 개념적 방향성을 띠기 시작하는 전반적인 변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전히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한 작가로서 그의 중요성은 그가 시간이라는 심오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기 위해서 극히 단순한 방법, 즉 숫자 세기라는 방법을 통해 어떤 전체성을 구현해낸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업이 대중들의 주목을 처음으로 받게 되었을 당시를 제외한다면,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미술 창작에 대한 어떤 입장을 공유하는 방식에 있어 특정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적 관점에서 그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는 전세대 작가라면 아마도 온 가와라(On Kawara)를 들 수 있겠다. 온 가와라의 '날짜 회화들'은 회화들이 그려진 날짜들을 알려주는 데, 그것들은 이미 40년 이상 모아져서 방대한 일기 혹은 달력이 된다. 이러한 것은 미래의 어느 날 한 개인의 성년에 해당하는 생애의 궤적을 영구히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미야지마의 작품에는 참조 대상이 확실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한가지 방식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작업 이면에 있는 전략은 좀더 언어수행적(performative)인데, 그의 작품들은 잘 알려진 디지털 프로세스의 사용에 기반하여 충격을 던져 준다. 그는 시간에 대한 경험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미혹으로서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정교한 무대로 만들어낸다. 처음 주목을 받았던 작품 '시간의 바다'(Sea of Time, 1998)에서 미야지마는 관객을 하나의 봉인된, 어두운 방에 있는 관객으로 전환시킨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방 안으로 들어서 1, 2피트 정도의 문턱을 접하고, 내부로 넓게 확장된 검은색 바닥으로 시선을 향하게 된다. 그 바닥에는 수백개의 LED 디지털 장비들이 무작위적으로 놓여있고, 각 장비들은 약간씩 속도를 달리하며 1부터 9까지 반복해서 숫자를 세어 간다. (미야지마는 0을 쓰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러한 광경의 가장자리에 서서, 처음에는 LED 무리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에, 그 다음에는 개별적 장치들의 변화 과정에 빠져들게 되는데, 각각은 특정한 시간 경험의 방식에 의해 따로 따로 식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미야지마는 LED들에 개별적인 역할을 부여했고, 그것들과 맺어지는 우리의 본능적 관계는 각각의 LED들이 깜박거리는 공간들을 점유함에 따라 각기 독특한 템포로 정해지는 어떤 종류의 실체들이 된다.
'시간의 바다'가 세계미술계에 던진 영향으로 인해 미야지마는 그것의 조각적 근거들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찾게 된다. 즉 조각적인 계측기 연작에 의한 작품의 해체가 건축적 배열의 복합성 안으로 배치되면서 1990년대 초 이래의 많은 작업들에 통합된 느낌을 부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미야지마 작품의 전체적 양상은, 단일한 LED 장비의 조각적 근거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도쿄 오페라 시티(1996)와 나오시마 섬에 있는 에도 시기의 집(2000)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그에게서 가장 의미 깊은 공공 프로젝트들의 원천이 되었다. 도쿄 오페라 시티에서는 하나의 작은 장비를 정문 외부 계단의, 10번째와 12번째 발판 양 옆에 박아 넣어, 그 층계를 이용하는 사람 가운데 단지 소수가 발견할 수 있도록 매우 신중하게 설치했다. 또 나오시마 현대 미술관 프로젝트에서는, 에도시기 집의 거실을 얕은 수영장으로 개조하고, 그 바닥면에는 이 작은 마을의 거주자들이 선택한 여러 가지 색과 속도의 계측기들이 설치되어 깜빡거린다.
계측기의 정적인 사용 방식에 의한 그의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자, 미야지마는 곧 1-2년간 관객들로 하여금 시간의 다른 차원을 시각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었다. 즉 관객들 각자는 대행자(agent)가 되어 각자의 동선과 속도를 따라 공간을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1993년을 전후로 제작된 작품들에서 잘 나타난다. 미야지마는 U자 형태의 차를 만든 작품 'U-cars'(1993-1994)에 운동성이라는 요소를 끌어 들였다. 이 작품에서는 각각의 계측기가 센서를 장착한 소형차에 부착되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다른 차들을 비롯한 오브제들의 경로를 빗겨 다녔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어둡게 구획된 공간 속에 100개의 차들을 끌어들였고, 그것들은 개별화된 시계들의 무리가 서로 밀치고 가로지르는 방식을 통해 '범퍼 카(bumper car)'의 효과를 창출했다. 또한 '러닝 타임'(Running Time No.2, 1995)이라는 작품은 억압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 작업은 관객을 쫓아다니거나 멀어지는 방식의 운동성을 통해, 단순한 물리적 운동을 넘어 근접성(proximity)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삶의 비인간화 국면에 대해 이상스럴 만치 우울한 정서가 감도는가운데, 그의 작업들은 예술가로서의 미야지마의 가장 의미심장한 성취의 어떤 면을 기념화하는 동시에, 1990년대가 만들어낸 많은 단일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미야지마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오리지널한 조각적 근거들을 새로운 개념적 영역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한 LED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다른 작품들을 제작해 왔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보여준 '메가 데스'(Mega Death, 1999)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 사건과 직접 연관된 작품으로, 카운트 다운하는 포맷을 이용하여 모든 디지털 계측기가 동시에 작동함에 따라, 한 순간에 방안은 완벽한 어둠이 된다. 미야지마가 작품의 이러한 특성을 언론에 미리 공표하지 않았던 그 순간의 의미는, 핵폭탄이 폭발했던 바로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것은 수많은 개인의 죽음 뿐 아니라, 역사의 한 장(chapter)의 종결과 새로운 장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가 데스'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다른 작품과 함께 보여졌는데, 그것은 핵폭풍을 견디며 살아남은 유일한 유기체, 즉 감나무의 한 종자가 새로운 동일종의 새 자식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미야지마는 그 새롭게 태어난 자식들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여러 도시의 공공 정원에 심었다. 이점에서 하나의 생명체를 통해 그것은 역사적 기억 안에서 가장 무참한 생명 손실을 가져온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냈다.
지난 몇 년간 미야지마는 또한 'U-cars'의 운동성의 전제들을 관객이 위치한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설치작업인 '떠도는 시간'을 완성시키기 위해 작업해 왔다. 이 작품에서 바닥의 어두운 무대영역은 천정에 설치된 움직이는 프로젝터들과 연결되어 작동한다. 관객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투사된 환경, 즉 수십 개의 숫자들이 단지 앞서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변하는 크기, 색 그리고 운동들에 의해 형성된 환경의 일부가 된다. 관객들은 투사된 공간의 물리적인 일부가 되지만, 또한 표류하는 시간의 플랫홈 중의 하나에 따라 서있을 수도 있고 장면 안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미야지마는 자유로운 운동성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열어 주었는데, 모든 신체적 가라앉음, 보다 전통적 관조자의 수동성이 관객과의 새로운 상호관계, 즉 방문객의 예측할 길 없는 마음의 변화로 교체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야지마의 대부분의 작품이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요지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다른 미디어들을 포함하는 작업을 발전시켜 왔다. 1996년부터 미야지마는 '카운터 폭포'(Counter Falls)라는 제목의 연작들을 만들어왔다. 이 작업들은 시간의 경과에 관한 '깨달음'이 언어와 문화적 지향성에 의거하는 방식들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데, 언어와 문화적 지향성은 죽음의 부단한 근접성에 대해 '감응하는 깨달음' 을 산출한다. '카운터 보이스'(counter Voice) 시리즈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의 여러 개인들을 모아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며 제각기 비디오 프로젝션을 통해 동시에 보여진다. 각 참여자들은 카운트다운을 세며, 0을 세는 대신 물이나 우유 혹은 와인이 담긴 그릇에 머리를 넣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야지마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죽는 시간을 재는 내부의 시계를 갖고 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어느 정도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적 맥락 안에서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다. 미야지마는 이러한 현실을 집결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억지로 보존하면서, 절박한 죽음에 대한 암묵적 깨달음이 다양한 문화적 상황들 안에서 어떠한 근본적 역할을 수행하는지 탐구한다.
시간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이론가와 철학자들은 사회가 시간의 궤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전개해온 정교한 메커니즘이 일종의 상호 기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기만이라는 것은 시간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시간을 측정하는 테크놀로지 역할에 대한 일종의 절대적 믿음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릇된 안정 장치가 일종의 문화적인 닻으로 기능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서 카오스의 감정들을 떼어낸다. 즉 사람의 운명이 사람의 손을 절대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알려질 경우 발화되는 카오스의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에서 제거되어 버리는 것이다. 미야지마는 일상 생활에서 테크놀로지의 역할이 숭배 대상(물신화)이 되는 것을 피하며 우리로 하여금 생생하게 테크놀로지의 환영(illusion)을 관통해 보도록 초대한다. 또한 시간이 경험되는 방식들에 대해 좀더 회의적인 태도를 구축하도록 도와준다. 결국 미야지마가 희망하는 바는 시간의 경과를 일종의 '영원한 현재'로 경험하며, 과거와 미래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이 어떤 효과를 갖는 유일한 시간이 되는 것은 바로 지금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다른 미술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미야지마는 이러한 '지금'을 어느 정도 다르고 좀더 사색적인 렌즈를 통해 고려해 보도록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무도 잘 빠져나가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이, 시간의 출발 이전에서부터 시간이(또한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간의 연속성 만큼이나 무한하다는 생각을 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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